《조선 농부들이 개간에 착수한 길림성 만보산 수전에 사용할 용수의 수로 개착문제로 중국관헌과 중국농민 약 오백 명(그중에는 사오십 명의 군경도 섞엿다고 함)은 이통하(伊通河)의 제언을 터쳐버리고 수로를 파괴하고 조선농민을 포위, 공포를 발사하며 퇴거를 강박 중이다. ―동아일보 1931년 7월 4일자》
한-중 농민 물꼬싸움
사태 키운 일제는
두달후 만주 침공
완바오 산 사건 이후 일제는 조선인 보호를 빌미로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1931년 9월 군사행동을 개시한 일본 관동군. 동아일보 자료 사진
다음 날은 육탄전이 벌어졌다. 이를 지켜보던 일본 경찰이 “조선인도 일본 국민”이라며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총을 발포했다. 중국 농민들은 혼비백산했다. 약간의 부상자가 있었지만 사망자 없이 마무리됐다. ‘완바오 산(만보산)’ 사건의 시발이었다.
특히 평양에 살고 있는 중국인의 피해가 컸다. 평양에는 인천의 1700여 명보다 훨씬 적은 779명의 중국 상인이 살고 있었다. 당시 살해당한 122명의 화교 중 94명이 평양 거주자였다. 이는 일본 경찰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일제는 부산과 천안에서 불량배를 매수해 폭력행위를 조장하기도 했다. 이는 일제가 중국과 조선의 반일 공동전선 구축을 파괴하고 양 민족을 이간하고 분열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1931년 7월 7일 ‘이천만 동포에게 고합니다-민족적 이해를 타산하여 허무한 선전에 속지 말라’는 사설을 게재하고 “동포여, 우리가 조선에 와 있는 중국사람 8만 명에게 하는 일은 곧 중국에 있는 100만 명 우리 동포에게 돌아옴을 명심하십시오. 즉시로 그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일을 중지하십시오”라고 호소했다. 사태가 진정된 7월 18일 중국 국민당은 성명을 내고 “완바오 산 사건은 일본의 계획적인 음모에 의한 것이고 조선인들의 국내 폭거도 일본이 사주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두 달 뒤인 9월 18일 일본의 의도가 드러났다.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중국 대륙을 침공했다. 일제는 ‘중국 내 일본 국민의 신변이 위협받고 있어 보호가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일제는 더 확실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랴오닝(遼寧) 성 펑톈(奉天·현재의 선양) 외곽 류탸오거우(柳條溝)에서 스스로 만주철도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 측 소행이라고 뒤집어씌운 뒤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일본 관동군은 1932년 초까지 만주 전역을 거의 점령하고, 같은 해 3월 1일에는 괴뢰국가 만주국 성립을 선포하여 침략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