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안되는 드라마의 법칙을 일깨워 준 범작
이제는 '드라마 공화국'이란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드라마가 제작되고 소비된다. 산출량이 늘었으니 보석같이 반짝이는 드라마도 적잖이 발견된다. 반면에 부실한 내용으로 이름조차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퇴장하는 드라마도 부지기수다.
KBS ‘추노’와 맞대결 중인 MBC ‘아결녀’
첨단 트랜드를 제시해 사회적으로 이슈를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시청률이 높아 광고 시간이 높은 가격에 판매되고, 해외수출까지 이어진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가끔 '저주받은 걸작'이 나오긴 하지만 그 종합적인 지표가 시청률이라는 데는 큰 이의가 없다.
방송사와 드라마 제작사 모두 대작드라마 한두 편으로 사세(社勢)가 뒤바뀔 정도니, 드라마 기획부터 방송되는 그 순간까지는 그야말로 전쟁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관건은 드라마가 시작된 이후 8주 길게는 12주 안에 시청률이 정체하지 않고 상승곡선을 그리는 것.
드라마와 영화는 닮은 점이 많은 장르다. 영화의 흥행공식은 공식적으로 "답이 없다"로 정리가 된 상황. 영화제작자들은 고사도 지내보고 경쟁자를 피해 개봉일을 택해도 보고, 입소문을 관리하기 위해 정성을 아끼지 않는다.
드라마의 성공 공식 역시 누구도 쉽게 정리할 수 없는 일. 반대로 '잘 안 되는 공식' 만큼은 비교적 명확한 편이다. MBC 수목드라마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아결녀)는 최근 잘 안되는 드라마가 범하기 쉬운 오류를 남발하는 대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말할 필요가 없다. '추노'는 시청률 30%라는 꿈의 고지를 단 4회 만에 돌파한 최고 화제작이다. 지난해 '선덕여왕'(월화) '아이리스'(수목)와 맞붙었던 경쟁자들은 하나같이 시청률 10%를 넘지 못하고 '저주받은 걸작'의 반열에 올라야 했다. '추노'보다 2주 늦게 시작된 '아결녀'는 시작부터 실패의 늪에 빠진 셈이다.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완소 동생 김범(왼쪽). 사진제공 I MBC
전문직 드라마는 대부분 화제를 모으고 시청률도 나쁘지 않았다. 최근 방영되는 '파스타'(요리사)나 '제중원'(의사)이 그렇다. '추노'도 조선시대 추노꾼을 다룬 직업드라마로 볼 수 있다. 대중들이 잘 모르는 세계를 실감나게 그려낼 때 뉴스가 되고 화제를 모으기 마련이다.
그런데 드라마가 종종 방송국을 무대로 삼는 경우가 있다. 작가가 여타 직종에 대해 연구할 시간과 자신이 없을 때 들고 나오는 보수적인 설정이다. 대중들이 방송국을 선망하는 것은 맞지만 불행하게도 이 배경은 너무 자주 활용됐다. 최근 몇 년간 방송사를 배경(작가, 기자, PD, 배우 등)으로 한 드라마 가운데 성공한 경우는 연예계를 비튼 '온 에어(2008)'가 거의 유일하다.
③ 익숙한 캐릭터, 고스란히 재활용
드라마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들의 면면을 따져보면 이 드라마는 '떠야' 하는 드라마다. 최철호(내조의 여왕) 김범(꽃보다 남자) 이필모(솔약국집 아들들) 등 우리가 사랑하는 캐릭터가 다수 등장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를 통해 새로 창조된 캐릭터는 없고 전작의 성공에 기대고 있을 뿐이다. 극의 신선도만 떨어뜨릴 뿐이다. 이 또한 안전한 선택의 연장선에 있다.
게다가 '꽃미남' 김범을 망가뜨릴 이유를 가진 작가나 PD는 없다. 한창 잘나가는 김범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같은 이미지 소비는 김범에게도 플러스가 되지 못하고 있다.
④ 뒤늦은, 그리고 잘못된 컨셉트 - '골드미스'와 '결혼'?
골드미스? 첨단 트랜드로 오해하기 쉬운 주제어다. 주인공은 UBN 보도국 기자 이신영과 동시통역사 정다정(엄지원), 그리고 레스토랑 컨설턴트 김부기(왕빛나)이다. 남부러울 것 없는 직업에 미모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신세한탄을 나눌 끈끈한 이성친구까지 갖췄다. 오로지 결혼 상대만 없을 뿐이다.
하지만 이 같은 골드미스 딜레마는 정이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SBS '달콤한 나의 도시'(2008)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에서 충분히 써먹은 주제다. 오늘날 직업도 변변치 않고 이성친구도 없는 이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위안을 삼아야 할까?
⑤ 미장센이 머야? 부실한 화면에 대비된 화려한 의상
드라마는 갈수록 영화의 세계를 닮아 간다. 이제는 여주인공의 곱게 화장한 연기보다 드라마의 배경이나 미술 같은 미장센이 중요해졌다. 결국 명품 드라마의 조건은 철저하게 준비된 '리얼리티'에 달린 셈이다(심지어 경쟁자 '추노'는 조선시대 의상에 지퍼가 달렸다고 해서 논란이 될 정도다)
'아결녀'는 각종 대작드라마로 한없이 눈이 높아진 시청자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초라한 세트를 들고 나왔다. 물론 이는 부차적 요소일 뿐이다. 문제는 세 여주인공들의 화려한 명품의상이다. 아무리 뉴욕을 배경으로 한 '섹스 앤 더 시티'가 유행을 하고 패션지 시장을 다룬 '스타일'이 인기를 끌었다고 하지만, 상황에 맞춘 절제된 균형은 필수요소다. 여자 주인공을 띄우기 위해 마련된듯한 값비싼 옷들은 초라한 배경과 맞물려 드라마의 격을 한없이 떨어뜨린다.
# 결정적 장면
실패이유 ⑥-엉뚱하게 선정적 장면
2월18일(10회분). 서른네 살 총각 윤상우(이필모)와 마흔네 살 유부녀 최상미(박지영)는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 여자친구 신영의 배신에 분노를 느낀 상우는 우연하게 상미를 발견하고 뒤따르게 된다. 하필 이날 상미는 남편의 불륜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한다. 이에 상우는 "어디론가 데려다 달라"는 상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고. 결국 이들은 서로에 느끼고 있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진한 키스를 나누고 하룻밤을 함께 하게 된다. 낯 뜨거운 베드신으로 꺼져가는 시청률을 되살려 보자는 제작진의 절박한 심정이 반영된 장면.
30대 총각과 40대 유부녀의 아름다룬 사랑으로 '예쁘게' 봐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예고편은 시청자들을 다시 한번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최상미의 아들이 바로 신영이 사귀고 있는 대학생 하민재(김범)이라는 사실. 결국 멋진 커리어 우먼들의 사랑 얘기로 시작한 드라마는 막장 불륜드라마로 변신한 채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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