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에는 공부 얘기만!… 교무실 들어설 땐 ‘합격!’ 구호”오전 6시30분∼밤 11시40분, 하루 15시간 ‘공부 지옥훈련’밥 먹을 때도 허공 응시하며 단어 외우고… 공식 되새기고…“내년 봄엔 나도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자리에…”
이 시절이 누구에게나 아름답진 않다. 지난 대입에서 고배를 마시고 대입기숙학원에 들어가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있는 재수생들에게라면 더욱.
기숙학원의 재수생들은 오전 9시부터 밤 12시까지 수업과 자율학습을 반복하며 하루 15시간을 공부한다.
목표는 오로지 하나.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공부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현장, 기숙학원을 찾았다.》
18일 오전 6시 40분 경기 성남시 중원구에 있는 기숙학원인 성남대성학원. 점호 시작과 함께 학생들은 벽 한편에 걸린 액자 속 ‘나의 각오’ 문구를 크게 복창한다. 지도교사가 인원파악을 마치자 학생들은 서둘러 세면도구를 챙겨 샤워장으로 향한다. 생활지도교사의 통제에 따라 남학생과 여학생이 번갈아 세면을 마친다. 2층 식당으로 줄지어 내려가 식사를 한다.
정규수업이 시작되는 오전 9시. 한정훈 씨(18·서울 강동구)는 지난 한 달간 그랬듯 수업시작 전 마음속으로 ‘더 이상 실패는 없다’라고 세 번을 되뇐다. 수업이 시작됐다. 강사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학생들이 노트에 열심히 받아 적고 있는 순간, 한 씨는 벌떡 일어나 책을 들고 강의실 뒤편으로 향한다. 피곤으로 밀려오는 졸음을 떨쳐내려는 것.
지난해 11월 수능 이후 ‘공부계획을 스스로 세우고 실천하는 방법을 몰랐기에 실패했다’고 판단한 한 씨는 최근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찾았다고 했다. 그는 “평소 수학공부를 할 때 답을 맞히는 것에 급급한 나머지 ‘왜 이 문제를 틀렸을까’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큰 약점이었단 걸 알게 됐다”며 “이젠 문제를 틀리면 문제를 푸는 공식과 풀이과정을 일일이 오답노트에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 오답노트 작성은 학원에서 조언해 준 방법이지만, 나 스스로 정리하는 방법과 습관을 길렀다는 사실에 발전하고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학생들은 “이곳의 생활관리는 엄격하기로 유명하다”고 전했다. 휴대전화, MP3플레이어는 ‘당연히’ 소지가 금지된다. 심지어 ‘머리는 한 갈래로 묶어야 한다’ ‘점심시간에는 공부에 필요한 이야기 외에는 하지 않는다’ 같은 ‘행동강령’도 있다. 교무실을 찾을 때는 “합격!”이라고 경례를 한 후 용건을 말해야 한다.
이런 기숙학원 생활이 답답하지 않을까? 임서옥 씨(19·여·강원 강릉시)는 “오히려 생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꾸준히 공부할 수 있다”고 했다. 동네의 작은 학원을 다녀본 것이 전부인 임 씨로선 기숙학원에 적응하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왜 머리를 한 갈래로만 묶어야 하는지’ ‘왜 지난 3년간 가졌던 공부습관을 버리고 일정 시간에 일어나고 자야 하는지’ ‘왜 줄지어 이동을 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 불만을 품기 시작하니 나오는 음식, 잠을 자는 침대를 향해서도 전에 없던 불만이 생겨났다. 이런 불만투성이의 마음으론 재수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느낀 임 씨. 그는 지난해 수능을 보고 고사장을 나설 때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심정을 떠올리며 ‘여기서 죽을 만큼 열심히 공부해 보자’고 의지를 다졌다.
자율학습이 시작되는 오후 6시 40분. 박찬희 씨(19·여·경기 안양시)는 전날 자신이 ‘학습일기’에 써놓은 ‘자율학습목표’를 하나씩 확인하며 공부를 한다. 이날 박 씨의 공부목표는 ‘비문학, 쓰기 및 문학작품 정리’ ‘인터넷강의 2세트 듣기’ ‘○○문제집 풀기’ ‘문제집에서 틀린 문제 확인하기’ 등 4가지. 실천한 항목에는 ‘O’를 표시하고, 실천하지 못한 항목에는 ‘×’ 표시를 한 뒤 실천하지 못한 이유를 분명히 적어둔다. 지난달 초 기숙학원생활을 시작한 박 씨는 주위 학생들의 열정에 놀랐다. 수능 성적이 4∼5등급 나온 학생들이 서울지역 상위권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평소 ‘내 주제에 서울대는 어림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던 그로선 충격이었다. 박 씨는 “나도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내 목표를 서울대 심리학과로 ‘업그레이드’ 했다”고 말했다.
박 씨가 자신의 17일자 공부계획노트에 적어 넣은 ‘하루 정리 및 내일 다짐’ 내용에는 스스로를 응원하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 ‘원래 난 수학에 조금 거부감을 가지던 아이였다. 그런데 계속 하다보니 재밌고, 자연스레 흥미가 생긴 것 같다. 또 요즘은 여기서 아무 생각 없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 파이팅! 박찬희!’
이승태 기자 st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