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을 마치며
신문물 선보이고 민족의식 고취
동아일보에 비친 근대모습 통해
일제강점기 사회상 새롭게 조명
엄혹한 현실 속에서도 안익태 최승희 등 당대가 배출한 재사(才士), 재원들은 세계 최고의 반열에 이를 정도의 재능을 발휘하며 민족의 문화 역량을 입증했다. 선각자들의 치열한 계몽과 대중의 교육열은 광복 후 한국사회가 산업화 단계로 진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문화통치’ 내세운 일제 강압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의 지면에 비친 조선은 ‘문화통치’의 허울 속에 탄압과 차별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현행범이 아닌 사람도 경찰이 마음대로 구금할 수 있어 죄 없는 사람도 20일이나 유치장에서 고초를 받았고(78회 ‘경찰’) 초중등 학제에서부터 교육내용, 심지어 장례 절차에까지 조선인과 일본인 간의 끝없는 차별이 이어졌다(82회 ‘민족차별’). 일제는 ‘토지조사’라는 명목으로 전국 곳곳의 토지를 몰수하고 회사령과 광업령 등으로 조선인들에 의한 산업화 기회도 박탈했다. 나아가 일제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마음대로 파괴 및 반출했으며 신사 참배와 일본어 사용 강요로 민족혼을 말살하려 했다.
○ 생활의 편리와 민중의 자각
서민들은 여름이면 ‘전차 삯 10전으로 갈 수 있는 한강철교 밑’으로 몰려들었다(22회 ‘바캉스’). 대중은 새로운 형태의 문화상품에 빠져들었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 음반은 1만 장 이상이 팔려 대히트를 쳤고(59회 ‘대중가요’) 1925년 영화제작사만 12곳을 헤아렸다(77회 ‘영화’). 겨울 대동강은 매일 스케이트를 지치는 수백 명의 청년들로 장관을 이루었다(90회 ‘빙상’).
○ 정론으로, 사업으로 민족혼 고취
국권을 빼앗긴 시기에 민족 언론은 겨레의 대변자였다. 동아일보는 과감한 보도와 논설로 일제의 강압에 맞섰다. ‘양심을 기만하는 자는 친일이 되고 자기의 양심을 그대로 발표하는 자는 배일(排日)이다’라는 1922년 4월 9일 사설에서 보듯 일제와 매족(賣族)세력을 직접 겨냥한 논설이 이어졌다. 일제의 핵심 인물들을 겨눈 의사(義士)들이 법정에서 피력한 소신도 지면에 그대로 전해졌다. “조선독립을 이루기까지 긋치지 아니할 것이라. 아모리 문화통치를 한대야 그것을 찬성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업스며….”(1922년 5월 9일자 김익상 의사 법정진술·29회 ‘김익상 의거’)
민족혼을 고취하는 행사와 특집기사도 이어졌다. 1923년 5월 15일 민족 지도자의 면면을 부각하기 위해 실시한 ‘현대인물투표’는 총독부가 결과 부분을 삭제해 하얗게 지워진 채 보도됐다(14회 ‘현대인물투표’). 육당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 연재, 충무공 이순신 현창사업, 우리 역사와 문화를 되돌아본 ‘오천년 문화 재음미’ 기획연재 등도 우리의 민족혼을 압살하려는 일제에 맞선 ‘문화투쟁’이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 ‘근대 풍경’ 어디서 찾았나
신문PDF와 결합된 본보 색인 DB 활용
근대 사회상 다룬 서적도 참고
‘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 연재는 동아일보의 ‘1920∼1962년 색인 데이터베이스(DB)’ 덕택에 가능했다. 오늘날 신문기사는 디지털로 작성돼 검색이 용이하지만 디지털화 이전의 신문은 색인이 제공되지 않을 경우 날짜별로 신문 전체를 읽으며 필요한 주제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의 ‘1920∼1962년 색인 데이터베이스’는 1982년 10권의 책으로 완성된 동아일보 색인집을 디지털화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1969년 1월 기사 색인집 발간작업을 시작해 13년에 걸쳐 색인집을 만들었다. 2001∼2003년 이 색인집을 디지털화한 뒤 신문지면을 담은 PDF와 결합했다. 이 색인 데이터베이스는 현재 동아일보 홈페이지(www.dongA.com)에서 일반 독자들에게 유료로 제공하고 있다.
동아일보 지면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당대 폭넓은 사회상을 알아내기 위해 참고도서도 이용했다.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신명직 지음·현실문화연구), ‘부랑청년 전성시대’(소영현 지음·푸른역사), ‘경성상계’(박상하 지음·생각의 나무), ‘꼿가치 피어 매혹게 하라’(김태수 지음·황소자리) 등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사회상을 전해주는 대표적인 도서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