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생생한 증언… 미국인 女선교사 노블의 일지 번역출간
1919년 3월 1일 경성부청(현 서울시청) 앞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독립을 외치며 만세를 부르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892∼1934년 한국에서 남편과 함께 선교사로 일한 매티 윌콕스 노블 씨의 눈에 비친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모습이다. 그는 42년간 한국에 살면서 보고 들은 것을 일지 형태로 기록했다. 이화여대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강선미 박사가 그의 일지 6권에서 주요 내용을 뽑아 ‘노블일지’(이마고)를 펴냈다.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3·1운동에 대한 노블 씨의 생생한 묘사다.
1919년 3월 1일자 일지에서 그는 “오후 2시부터 ‘한국은 해방됐다’는 게시문들로 거리는 홍수를 이뤘고, 사람들은 이를 사실로 믿고 기뻐하고 있다”고 썼다. 이후의 일지는 즉각 탄압에 나선 일본군의 잔인한 행위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확산된 만세운동에 대한 증언으로 이어졌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인 1936년의 매티 윌콕스 노블 씨. 사진 제공 이마고
“한국 전역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만세 시위가 벌어질 때면 사람들은 전차를 세우고 모든 승객들에게 만세를 외치게 했고, 차장과 운전사도 손을 들고 만세를 외쳐야 했다. 이때 일본인들도 ‘반자이’라고 외쳐야 했다.”(3월 9일)
일지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들은 만세운동에 동조해 파업을 벌였고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진행했다. 노블 씨는 3월 10일 “한국인 전차 운전사와 차장들이 파업을 선언해 오늘은 거리에 차량이 별로 없다. 또한 오늘은 아무도 일본 상품을 구입하지 않았다”고 썼다.
노블 씨는 일본인의 잔인한 행위를 고발하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일지에 옮겼다. 3월 17일자에서 그는 “우리는 세 명의 여성이 평양에서 잔인한 고통을 당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저들은 여성들을 발가벗긴 후 찬물을 끼얹고 그들의 머리카락으로 기둥에 묶었다고 한다”고 기록했다.
일본인의 잔인함에 대한 고발은 계속됐다. “요즘은 밤에 한국인이 거리를 걷기만 해도 경찰에게 매를 맞는다.”(3월 30일) “3월 31일 저녁 한 한국인 남성이 정부에 고용된 소위 일본 재향군인들에게 잡혀서 매를 맞아 밤사이에 죽었다. 이것은 하나의 예외적 사건이 아니다. 이러한 경우가 수도 없이 많고 증거도 확실하다.”(4월 2일)
일지 곳곳에선 한국인의 용기를 높이 평가하는 노블 씨의 감상이 엿보인다. “모두 재판소로 들어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그들은 그 때문에 더욱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을 구할 수만 있다면 목숨은 개의치 않을 것이다.”(3월 23일)
“저녁 8시 45분. ‘대한독립 만세’ ‘조선독립 만세’. 다시 거리 군중의 감동적이고 비통스러우며 용감한 외침들이 우리 집 창문을 통해 들려온다.”(3월 26일)
노블 씨는 1919년 4월 15일 경기 수원군(지금의 화성시) 제암리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주민 학살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도 일지에 남겼다. 일지에 따르면 사건 직후 미국 부영사를 비롯한 외국인 조사단은 제암리를 방문해 재가 된 교회와 숯덩이가 된 시신들을 목격했다. 노블 씨의 기록을 보면 당시 학살은 제암리뿐 아니라 더 광범위하게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