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가수의 단골 레퍼토리, 섹시 여자 도둑의 새 역사
걸그룹 '카라'의 2010년 도전장이 공개됐다.
지난해 엉덩이춤 '미스터'를 외치며 남성 팬들을 '미치게'(가수 김태우의 표현에 따르면) 만들었던 카라는 이번에 새로운 컨셉트를 선보여 곧장 화제의 중심이 됐다. 20세기 초 프랑스 추리소설의 신비로운 캐릭터 '루팡'의 이미지를 입고나선 것이다.
카라 3집의 대표 이미지는 ‘괴도 루팡’이다.
'Tasty love', 'Lupin', 'Umbrella', 'Rollin'', 'Lonely' 등 5곡이 담긴 '미니앨범'이라 할 수 있는 EP 앨범의 형태다.
냉정하게 앨범을 평가하자면 첫 곡 'Tasty love'의 완성도와 안정성이 타이틀곡 '루팡'보다 돋보인다. 그러나 도발적인 컨셉트와 변신의 필요성, 그리고 비쥬얼과 현란한 댄스를 포함한 종합 엔터테이너 입장을 고려해 '루팡'을 타이틀로 내세운 것은 당연한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 소녀시대 신보 불과 3주 뒤에 치고 나온 카라
음악적 측면에서 '루팡'에 대해 이미 많은 대중음악평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여기서는 카라의 새로운 컨셉트와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서사적 스토리텔링에 초점을 맞춰 본다.
그것은 첫째, 루팡이 개인적 안위를 위해 훔치는 것이 아니라 위선적인 고위층의 재물을 빼앗아 '레미제라블(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때문이다.
카라는 짙은 메이크업과 퇴폐적인 이 패션 스타일로 남성 관객들을 유혹하고 나섰다.
둘째, 루팡은 돈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험과 낭만을 즐기며 불가능에 도전하는 자존심으로 훔치기 때문이다.
셋째, 루팡은 상대가 악당이 아닌 한 절대 인명을 해치지 않으며 평화를 사랑하는 성격이다. 어찌 보면 '박애, 자유, 평등'이라는 프랑스인의 정신을 상징한다. 이 소설을 현실의 윤리적 잣대로 읽어서는 그 묘미를 느끼기 힘들 것이다. 카라의 '루팡' 역시 이러한 전통의 매력을 담뿍 담고 있다. 다만 이번의 신비로운 도둑은 다섯 명의 섹시한 여자도적단이다.
네 심장소리가 들켜.
쉿!
뒤에 서서 침착하게 지켜봐봐.
탐난다고 서두르단 결국 게임 셋.
유연하게 행동해봐.
As usual it's mine(늘 그렇듯이 그건 내꺼야)."
▶ 다섯 명의 섹시한 여자 도적단 '카라'
루팡은 제임스 본드의 원형에 가깝다.
그런데 루팡이라는 의로운 도적의 원형은 더 거슬러 올라가 우리나라 홍길동, 임꺽정, 전우치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세계적인 캐릭터다. 섹시한 여자 도둑의 전설 또한 알고 보면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99년에 개봉된 두 영화가 있다. 매혹적인 캐서린 제타 존스가 연로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섹시남인 숀 코넬리와 짝을 이루어 고미술품 도둑으로 등장한 '엔트랩먼트(Entrapment 함정수사)', 그리고 여배우 르네 루소가 피어스 브로스넌과 호흡을 맞춘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가 그것이다.
재미있게도 두 남자배우 숀 코넬리와 피어스 브로스넌은 모두 요즘 김연아가 띄워주고 있는 '007-제임스 본드' 출신이다. 캐서린 제타 존스가 금고에 침입하기 위해 타이트한 수트를 입고 유연하게 적외선 방어막을 통과하는 명장면은 국내 핸드폰 광고에서 '원더걸스'가 따라 할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다.
한편 추리극 형식을 띤 다른 핸드폰 광고에선 이효리가 보석을 훔치는 여자도둑 용의자를 연기했다. 우리나라 영화로 2008년 초 개봉된 '무방비도시'에서는 손예진이 베테랑 소매치기 백장미 역으로 출연하여 매력을 발산했다. 이 같은 일련의 섹시 여도둑 캐릭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탄생한 ‘루팡’은 수많은 대중문화에서 재현돼 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루팡3세와 ’영화 ‘루팡’.
표면적으로는 미술품, 보석 등 고가품을 훔치지만 사실은 상대 남자배우와 남성관객들의 마음을 훔친다는 것이다.
이 또한 카라의 '루팡'이 바라마지않는 전략적 목표 아니던가? 카라의 '루팡'의 가사를 음미하면 더욱 그 의미가 분명해 진다.
"한눈팔면 기회조차 뺏겨버려. 쉿! 누구보다 한발 먼저 다가가 봐. 남들처럼 티내다간 결국 게임 셋. 유연하게 행동해봐. As usual it's mine(늘 그렇듯이 그건 내꺼야)."
한 세기 전 루팡의 역사적 이미지는 멋쟁이 신사정장에 실크햇, 그리고 외알 안경과 지팡이였다. 마찬가지로 카라는 블랙정장과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까지 제대로 들고 나타났다.
카라 '루팡'의 패션코드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자주 보던 스타일이기도 하다. 뮤지컬 '물랭루즈'에서 니콜 키드먼이 그렇게 등장했고, '시카고'에서도 캐서린 제타 존스와 르네 젤위거가 라스트신에 같은 스타일로 나타나 현란한 콤비댄스를 추었다.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의 남장 스타일 전통에서는 아카데미상까지 수상한 뮤지컬 '캬바레'가 원조 격의 위치에 있다.
국내에선 2000년 핑클이 3집 앨범 'Now'에서 유사한 블랙과 화이트의 연미복 스타일을 연출했었고, 2002년 박지윤이 5집 앨범 'Man'의 타이틀곡 '난 남자야'를 들고 나와 남장이 주는 파격미와 섹시미를 과시한 바 있다.
▶ 보석을 뒤쫓는 여도둑의 실제 목표는 '남성 관객'
짙은 메이크업과 어울려 묘하게 퇴폐적인 이 패션 스타일은 사실상 매우 안정적인 코드이지만 대중에겐 늘 파격적으로 다가오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상징과 기호, 비주얼 이미지, 곡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루팡'이라는 제목, 섹시한 여자 범죄단의 이미지, 그리고 뭔가 큰 한탕을 진행하는 곡의 분위기가 어우러진 카라의 새 컨셉트는 치열한 걸그룹 전쟁에서 매우 영리한 전술을 담고 있다.
걸 그룹에서 여성그룹으로의 변신을 눈앞에 둔 카라는 이번 3집을 통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가고 있다. 스포츠 동아 임진환
우선 지난해 '아브라카다브라'로 대박신화를 일군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섹시미와 겹쳐 들어간다. 나아가 치어리더의 스포티한 차림으로 돌아간 소녀시대 'Oh!'의 뮤직비디오 말미에 깜짝 등장한 '블랙소시' 예고편에 대해 '우리가 먼저!'라고 기선제압을 한다. 한편 '무서운 언니들'로 불리는 '애프터스쿨'에 대해서도 견제구를 날린 셈이 됐다.
올봄을 휩쓸 것으로 예상되는 5인조 여성도둑들의 두뇌게임에 안티세력은 상대적으로 희미해 보인다. 소녀시대가 오빠, 삼촌부대를 현혹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오빠!'를 남발하며 여성 팬들을 밀어내는 위험수를 끌어안은 반면 '루팡'은 남성과 여성 모두의 판타지에 충실하게 다가간다.
남자들은 복잡한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비록 면도칼을 씹으며 지갑을 털어가더라도 저런 예쁘고 멋진 악당들 좀 만나봤으면, 하고 꿈꿀 것이다. 그리고 현실의 포장마차를 나서서 환상의 밤길을 헤맬 것이다.
더불어 여자들에게는 "높이 올라가 세상을 다 가져봐"라고 외치며 안 그래도 갖고 싶은 것이 많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욕망을 한껏 자극한다. 그리고 남자의 마음을, 혹은 남자의 재물(?)을 훔치려면 먼저 행동하고, 주도권을 장악하라는 강한 메시지를 날린다. 절묘하게 다양한 팬 층을 아우르는 전략이다.
개인적으로는 지난해 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로 코난 도일이 창조한 명탐정 '셜록 홈즈'가 개봉했을 때 '왜 루팡은 영화로 안 만드는 거지?'하고 불만스럽던 욕구를 카라가 다소 해소해주어서 고맙기도 하다. 거기에 더하여 섹시한 여자 '루팡들'인 데야 더 고맙고.
그러나 2시간 분량의 영화와 다르게 3분짜리 노래에 담겨 버렸으니 카라에게 루팡의 '도벽'만이 아니라 그의 지성과 휴머니즘까지 담아달라고 한다면 과한 욕심이 될 것이다.
루팡을 사랑한 나머지 '루팡 3세'라는 만화와 애니매이션 작품까지 만든 일본의 원로작가를 만난 적이 있다. 가치 있는 캐릭터는 대중문화 속에서 늘 재해석되고 시대상을 반영함을 새삼 깨닫는다.
최영일 /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