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재 결정 의미-전망“대상 줄이고 오남용 방지” 국회에 존폐 해결 촉구작년 중반까지 ‘폐지’ 무게… ‘조두순 징역’ 비판에 진통
이강국 헌법재판소장(왼쪽에서 다섯 번째)과 재판관들이 25일 서울 종로구 가회로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사형제 위헌법률심판 제청 사건 선고를 앞두고 판사석에 앉아 있다. 왼쪽부터 목영준 민형기 김희옥 이공현 이강국 조대현 김종대 이동흡 송두환 재판관. 홍진환 기자
한국에서 사형제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7년 23명에게 사형을 집행한 이후 13년 동안 사행을 집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아는 헌재 재판관들은 지난해 중반에만 해도 사형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초등학교 여학생을 잔혹하게 성폭행한 이른바 ‘나영이 사건’ 이후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 사건을 일으킨 조두순과 같은 파렴치한에게 사형을 선고하지 않고 징역형을 선고한 법원에 비판이 쏟아졌다. 솜방망이 처벌 논란도 있었다. 헌재는 당초 지난해 말로 예정돼 있던 선고 기일을 연기하면서 의견을 수렴한 끝에 5 대 4의 합헌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정권에 맞선 정치범까지 사형시킨 암울했던 군사정권을 거울삼아 사형의 오·남용을 막기 위한 장치 마련도 주문했다. 1996년 사형제 첫 결정과 달라진 부분이다. 합헌 의견을 낸 민형기 재판관은 “사형 대상 범죄를 줄이거나 문제되는 법률 조항을 폐지하는 등 점진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송두환 재판관도 합헌 의견을 내면서 “사형제 존폐는 국민의 선택과 결단을 통해 입법적으로 해결할 문제”라며 국회의 법 개정을 촉구했다.
사형제 폐지법안은 15대 국회부터 현재 18대 국회까지 매번 제출됐지만 제대로 진행된 적 없이 기한이 지나 휴지조각이 되곤 했다. 가장 최근엔 지난해 10월 민주당 김부겸 의원이 현행법에서 규정된 사형을 가석방 없는 종신징역형으로 대체하는 내용의 사형제 폐지법을 발의해 현재 계류 중이다.
세계적으로 사형제를 없앤 국가는 최근 폐지한 아프리카 부룬디와 토고를 포함해 모두 92개국이다. 하지만 법원이나 헌재의 결정으로 사형제를 폐지한 나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루마니아에 불과하다. 대부분 국가는 국회에서 법 개정을 통해 사형제를 없앴다.
○ 사형제 유지돼도 사형 집행은 힘들 듯
성폭력을 동반한 살인죄에 대한 형벌이 헌법에 위반되는지도 이번 심판의 대상이었다. 일반 살인죄의 법정형은 ‘5년 이상 유기징역’인 반면 성폭력을 포함한 살인죄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으로 너무 무거워 평등의 원칙에 반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 헌재는 “성폭력은 개인의 성적자유를 침해한 중범죄로 더 엄하게 처벌할 필요가 있다”고 재확인했다.
이번에도 합헌결정이 났지만 사형제가 유지돼도 실제로 사형을 집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시간이 흐르고 사회 분위기가 바뀌면 간통죄처럼 사형제도 폐지 대상이 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헌재 관계자는 “이번 결정은 사형제의 법률적 위헌 여부를 가린 것이지 사형집행을 촉구하는 의미는 아니다”라며 “13년 동안 집행하지 않아 사문화된 사형제도를 이제 와서 집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
■ 1996년 합헌결정과 달라진 점
사형제도가 헌법에 위반되는지를 가린 헌법재판소의 판단은 1996년과 2010년 모두 ‘합헌’으로 같다. 하지만 합헌과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 비율과 세부 논거 등에서는 변화가 있었다.
1996년에는 재판관 7(합헌) 대 2(위헌) 비율로 합헌 결정이 내려졌지만 25일에는 합헌과 위헌 의견이 5 대 4로 바뀌었다. 표면적으로는 재판관 2명이 합헌에서 위헌 의견으로 옮겨간 셈이다. 1996년에는 김진우 조승형 재판관이, 25일 결정에서는 조대현 김희옥 김종대 목영준 재판관이 각각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합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이 보충의견을 제시한 것도 달라진 점이다. 1996년 결정 때는 합헌이라고 판단한 재판관들이 별도 보충의견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송두환 민형기 재판관이 사형제 존치를 인정하면서도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보충의견을 달았다. 민 재판관은 “사형 대상 범죄를 축소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송 재판관은 “반인륜적으로 타인의 생명을 해치는 극악범죄로 사형제 적용을 한정하고 사형제 존폐 문제는 국민의 결단을 통해 입법적으로 개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사형제도가 헌법 10조(모든 국민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에 어긋나는지에 대한 판단이 1996년에는 없었지만 이번에는 합헌과 위헌의 논거로 새롭게 추가됐다. 합헌 논거로는 “사형이 극악한 범죄에 한정적으로 선고되고 있는 이상 사형제도가 범죄자 생명권을 박탈한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규정한 헌법 10조에 위반된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이 제시됐다. 위헌 의견을 낸 김희옥 재판관은 “사형제는 범죄자가 한 인간으로서 반성과 개선을 할 최소한의 도덕적 자유조차 남겨주지 않는 제도”라며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합헌 논거가 1996년에 비해 강화됐다는 평가도 나왔다. 헌법에 규정된 사형제 조항과 생명권과의 대립관계를 해석하면서 “생명권이 최상위 기본권이라는 성격만으로 실정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사형제를 위헌이라고 부정하는 것은 헌법해석을 넘어 헌법개정에 이를 수 있다”는 이강국 소장의 합헌 보충의견이 대표적인 논거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 사형수 현재 57명… 1997년 이후 집행안해
그러나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7년 23명을 사형에 처한 이후 한국은 13년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국제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는 2007년 한국을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했다. 현재 수감 중인 사형수는 부녀자 10명을 납치·살해한 강호순, 혜진 예슬 양 살해범 정성현 등 59명. 이 가운데 57명은 사형이 확정됐고, 2명은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이들에게 사형을 집행하기는 앞으로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헌법재판소가 사형제에 합헌 결정을 내렸지만 제도 개선을 요구한 데다 정부도 국제적 시선을 고려해 사형 집행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 등 사형에 반대하는 인권단체의 노력으로 사형제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도 커졌다.
2008년 말 현재 사형을 폐지하거나 10년간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국가는 독일 프랑스 영국 등 138개국이다.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는 78개국 중에서도 실제로 형을 집행한 국가는 25개국이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 위헌신청 ‘보성 어부 사건’은
성추행 반항 여행객 4명… 바다에 밀어 빠뜨려 살해
사형제가 14년 만에 다시 헌법재판소의 심판대에 오른 것은 2008년 1심에서 여행객 4명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이 선고된 어부 오모 씨(72) 사건과 관련해 광주고법이 사형제에 대한 위헌심판 제청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오 씨는 2007년 8월 말 전남 보성군 회천면에 여행을 온 김모 씨(19)와 여자친구 추모 씨(19)를 자신의 어선에 태워 바다로 데리고 나간 뒤 추 씨를 성추행하기 위해 남자친구 김 씨를 먼저 물에 빠뜨려 살해했다. 이어 겁에 질려 반항하는 추 씨를 바다에 밀어 살해했다. 오 씨는 같은 해 9월 말에도 추석을 맞아 여행을 온 안모 씨(23·여)와 조모 씨(24·여)를 바다로 데리고 나가 성추행하려 했으나 반항하자 같은 방법으로 둘을 살해했다.
2008년 2월 광주지법 순천지원 형사합의1부(부장판사 조휴옥)는 오 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의자는 1차 범행 후 경찰의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2차 범행을 저지른 데다 피해 여성이 가슴이 노출되는 옷을 입어 범행을 하게 됐다고 책임을 전가하는 등 유족에게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줬다”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오 씨는 1심 선고 직후 광주고법에 항소했고 같은 해 9월 26일 사형제도가 헌법에 위반한다는 이유로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을 냈다. 광주고법이 오 씨의 신청을 받아들이면서 사형제는 다시 한 번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받았다.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