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은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세계에서 와인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잠재력 있는 나라지만 한때 양적인 팽창에만 치중해 와인의 변방 국가로 여겨지기도 했다. 대대적인 혁신은 1980년대 중반 시작됐다. 잠자는 거인 스페인의 기지개 펴는 소리는 국내에서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지난해 상반기에 수입된 스페인 와인은 칠레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여전히 스페인산 수입 와인 중에는 단가가 낮은 것이 많긴 하다. 하지만 스페인 와인의 약진은 기존에 인기 있는 와인 생산국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스페인 와인은 칠레산처럼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대형 호재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탈리아 와인처럼 피자 파스타와 같은 친숙한 음식의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니다. 스페인 와인협회나 스페인 정부의 대대적인 마케팅도 보이지 않았다.
스페인 와인 인기의 중심에는 리오하, 프리오라토, 리베라 델 두에로가 있다. 스페인의 레드 와인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대표적인 산지다. 스페인 원산지 등급인 ‘DO’보다 위 단계를 받은 곳은 이 세 곳뿐이다. 스페인 와인의 든든한 뼈대를 세운 리오하는 우리나라 겨울 스포츠의 전통적인 금밭인 쇼트트랙 스케이팅 종목에 비견할 수 있다. 이곳의 위상은 ‘스페인의 보르도’라는 별명이 말해준다. 스페인 레드 와인의 태동지이며 구심점이다.
스페인 와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리베라 델 두에로는 김연아라는 세계적 슈퍼스타를 배출해 낸 피겨스케이팅과 같다. 이곳의 우니코, 페스케라, 핑구스를 모르는 와인 애호가는 없다.
비인기 종목이었던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을 금밭으로 일궈낸 모태범 이상화 이승훈의 쾌거는 프리오라토의 성공 신화를 일군 다섯 명의 젊은 와인 생산자를 떠올리게 한다. 5개의 ‘클로’ 시리즈(클로 모가도르, 클로 도피, 클로 에라스무스, 클로 데 로바크, 클로 마르티네)를 탄생시키며 애쓴 이들의 수고가 없었다면 프리오라토는 여전히 황량한 고지대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김혜주 와인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