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정부통령 선거 앞두고 야당 유세장 참가 못하게고교생에 일요일 등교 지시… 8개 고교생 목숨건 가두행진내일 그곳서 50년전 함성 재현
2·28대구학생민주의거기념탑 터 표지석이 있는 대구 남구 대명동 명덕사거리에서 안인욱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공동의장(오른쪽)이 당시 학생들의 시가행진 코스를 가리키고 있다. 왼쪽부터 최용호 기념사업회 고문, 홍종흠 전 대구문화예술회관장, 장영향 기념사업회 부의장, 박명철 기념사업회 사무총장. 대구=정용균 기자
25일 대구 남구 대명동 명덕사거리 ‘2·28대구학생민주의거 기념탑’ 터 표지석 앞에서 일흔에 가까운 노인들이 감회에 젖은 모습이었다. 당시 대구고 2학년이었던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안인욱 공동의장(68), 최용호 기념사업회 고문(68·당시 경북대사대부고 2학년), 백진호 기념사업회 부의장(67·당시 대구고 1학년), 장영향 기념사업회 부의장(68·당시 경북여고 2학년), 박명철 기념사업회 사무총장(68·당시 대구공고 2학년), 홍종흠 전 대구문화예술회관장(68·당시 경북고 2학년) 등 6명은 오랜만에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이들은 1960년 2월 28일 자유당 독재정권에 맞서 전국에서 가정 먼저 시위에 나선 민주운동의 주역들이다. 이들은 그때의 소감을 묻자 어느덧 열정 가득한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백 부의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요일(1960년 2월 28일)에 등교하라는 지시를 전날 받고 학교운동장에 700여 명이 모였죠. 연단에 오른 교장선생님이 느닷없이 오늘은 시 외곽으로 ‘토끼잡이’를 간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날 수성천변에서 열릴 예정인 민주당 선거유세에 학생들이 참가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서로 눈빛으로 주고받았죠. 그때 갑자기 교문 쪽에서 ‘나가자’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어요. 모두 교문 쪽으로 우르르 달려가 어깨동무를 한 채 거리에 나가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쳤어요.”
1960년 2월 28일 대구 도심에서 자유당 독재정권을 규탄하며 시위를 하는 학생들의 모습.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는 28일 당시 학생들의 시위를 재현할 예정이다. 사진 제공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홍 전 관장은 “2·28민주운동이 그동안 역사적인 조명을 받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시위 도중 사망자가 없었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학생들은 당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때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이날 학생데모는 3·15마산의거, 4·19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했기 때문에 대구에선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다”며 “하지만 이듬해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면서 이 운동의 의미가 가려졌다”고 덧붙였다.
명덕사거리 한복판에는 이 운동이 일어난 지 1년여 만인 1961년 4월 ‘2·28민주의거 기념탑’이 건립됐다. 하지만 이 기념탑은 1990년 대구지하철 1호선 공사가 시작되면서 대구 달서구 두류공원으로 옮겨졌다. 박 사무총장은 “지금은 사거리 모퉁이에 설치된 기념탑 터 표지석만이 이곳이 ‘민주성지’임을 알리고 있다”며 “기념탑은 당시 대구·경북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다”고 설명했다.
기념사업회 측은 2·28민주운동이 반세기 만에 국가로부터 민주화운동으로서 법적 지위를 부여받게 된 만큼 특별한 기념행사를 준비 중이다. 28일 당시 학생들이 거리 시위를 벌인 대구 중앙대로에서 그날의 함성을 재현하는 퍼포먼스를 펼친다. 연극배우와 취타악대, 시민, 학생들로 구성된 퍼레이드단이 경북여고 정문 앞을 출발해 반월당∼중앙 사거리∼한일극장∼2·28기념중앙공원으로 이어지는 1.5km 구간에서 행진을 벌인다. 안 공동의장은 “대구에서 시작된 민주운동의 정신을 기억하는 소중한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