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살때 방학특강서 시작… 미셸 콴 보며 빙상여제 꿈 2002년 국제대회 첫 우승 - 2006년엔 은퇴도 고려 오서코치 만나 화려한 비상… 2009 세계선수권 세계新
2002 동아일보 김연아는 어린 시절부터 ‘한국 피겨의 희망’으로 불렸다. ‘김연아가 2002년 11월 피겨스케이팅 꿈나무 선발대회에서 압도적 기량으로 우승을 차지했다’고 전한 본보에 실린 당시 그의 모습이 깜찍하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피겨 여왕’ 김연아(20·고려대)가 본격적으로 피겨를 시작한 것은 1996년 여섯 살 여름이었다. 집 근처 과천시민회관에 실내링크가 생겼다. 함께 방학 특강반에 등록했던 언니는 몇 달 후 “재미없다”며 그만뒀다. 그는 계속 타고 싶어 했다. 집에 가면 만화영화 대신 피겨 선수들의 비디오를 볼 만큼 좋아했다.
마스터반이 끝나갈 무렵 당시 지도를 해주던 류종현 코치가 선수가 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어머니 박미희 씨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최소한 10년 넘게 시키려면 많은 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4만9000원이었던 수강료는 35만 원이 되고 9만 원이던 스케이트는 100만 원으로 바뀌었다. 생활의 중심도 ‘피겨’가 됐다. 1998년 나가노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미셸 콴(미국)을 보며 ‘나도 저렇게 멋진 선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10년 뒤 콴을 뛰어넘는 선수가 될지는 상상도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는 처음으로 어머니와 떨어져 미국 콜로라도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당시 지도자였던 신혜숙 코치는 “연아는 다른 학생들이 자유시간을 즐길 때 혼자 내일 연습에 쓸 장갑을 빨아 놓곤 했다”고 회상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흔들려 피겨를 하고 싶어도 못할 위기에도 처했다. 당시 그를 눈여겨보던 모 그룹의 회장이 후원금을 내는 등 도움도 받았다. 아버지 김현석 씨는 “연아가 피겨를 포기할 뻔한 적이 많았다. 그럴때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등 고비를 넘기곤 했다”고 말했다.
2002년 첫 국제대회였던 트리글라브 트로피 우승으로 김연아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리기 시작했다. 2003년에는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기쁨도 잠시. 일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10시부터 훈련해 다음 날 오전 2시에 잠자리에 드는 생활을 반복해야만 했다.
일본의 아사다 마오(20)는 예전부터 알았지만 처음 마주친 것은 2004년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대회였다. 아사다가 트리플 악셀 점프까지 성공하는 것을 보고 그는 “세상에 뭐 저런 애가 있나”라고 생각했다. 2006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를 준비하면서 그는 은퇴도 생각했다. 이유는 스케이트 때문이었다. 4개월은 신어야 하는 스케이트가 일주일만 신으면 탈이 났다. 다행히 그랑프리 파이널 이후 스케이트를 무료로 제공하는 회사가 나타나면서 문제는 해결됐다.
2006년에 그는 피겨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을 만나러 간 캐나다에서 브라이언 오서 코치와 만나게 된 것이다. 그를 보고 ‘토털 패키지(Total Package)’라 부르며 감탄한 오서 코치는 김연아를 생애 첫 제자로 맞이한다. 윌슨 코치는 수줍음을 잘 타던 김연아를 자신을 제대로 표현할 줄 아는 소녀로 변신시켰다. 이후 김연아는 각종 세계 대회를 석권했다. 2007∼2008시즌에 3개의 그랑프리 대회를 휩쓸었고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번 시즌 김연아는 천하무적이다. 세 번의 대회에 나서 모두 우승했다. 지난해 12월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남은 것은 밴쿠버 겨울올림픽 금메달뿐이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과 기대로 많은 부담감을 안고 있었지만 김연아는 모든 것을 이겨내고 올림픽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섰다. 금메달이 그에게 모든 것은 아니다. 그는 “감동을 주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미 그는 국민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줬다.
밴쿠버=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