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통신시장이 급속하게 성장하던 2000년대 초반 국내에서는 통신회사별로 소비자가 구분되었다. 번호만 다른 게 아니라 전화기에 사용하는 기술표준이 달라 사용하는 콘텐츠를 주고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당시 정보통신부는 동일한 이동통신 콘텐츠를 통신회사 구분 없이 사용하게 함으로써 호환성을 높여 소비자 후생을 증진한다는 취지로 2005년 4월부터 휴대전화에 한국형 무선인터넷 플랫폼의 표준규격인 위피(WIPI)를 의무화했다.
위피 의무화 정책이 발표되자마자 미 무역대표부(USTR)는 국내 시장에서 높은 시장점유율을 차지하던 퀄컴사의 핵심부품 수입을 막기 위한 비관세 장벽이라고 강력하게 문제 제기를 했다. 휴대전화 칩에 자사의 플랫폼을 탑재하여 연간 28억 달러가량 수출하던 퀄컴으로서는 한국이 위피 플랫폼만 허용하자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독자 기술로 개발한 한국형 표준이라는 자부심에다 소비자 후생을 앞세운 한국 정부와 부당한 교역장벽이라는 미국 정부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위피 문제는 수년 동안 양국 간 최대 통상현안으로 부각되었다.
기술장벽에 갇혀 아이폰 도입 지연
한편 우여곡절 끝에 위피 표준이 한국 시장에 정착될 즈음인 2007년 6월 아이폰이 출시되면서 최빈 개도국인 니제르와 우간다에까지 소위 스마트폰을 앞세운 모바일 인터넷 혁명이 확산되었다. 정작 정보통신 강국을 자처하던 한국은 위피 장벽을 두른 탓에 스마트폰 열풍에서 비껴나 있었다. 그러는 동안 한국형 표준에 기초한 한국형 기술 개발은 결국 모바일 인터넷 기술 진보에서 한국만 점차 낙후시켰다.
이번 정부 들어 새로이 출범한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해 4월 위피 의무화 제도를 전격적으로 철폐했다. 그러자 위피 사용을 거부하던 아이폰이 국내에 도입되었고 뒤늦게 우리 정보통신시장도 모바일 인터넷 기술을 빠르게 수용하면서 신기술과 상품의 각축이 전개되고 있다.
위피 개발과 도입, 그리고 아이폰 수입까지 과정이 보여준 기술표준정책과 관련 산업발전 간의 역학관계에 대한 경험은 정부와 산업계가 깊이 되새겨야 한다. 기술 발전을 유도하여 소비자 후생을 증진하는 데 골간이 되어야 하는 기술표준은 자칫하면 기술장벽으로 돌변하여 교역 상대국은 물론이고 산업과 경제에 치명적인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우리의 기술표준체계는 1995년 WTO 출범과 함께 기술장벽 협정을 수용하면서 대폭 개선되어 현재 국가표준에서는 대부분의 국제기준을 반영한다. 특히 WTO가 설립된 직후 기술표준 문제로 연거푸 세 번이나 분쟁해결기구에 피소되면서 비교적 신속하게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졌다.
국제기준 속 경쟁이 IT산업 갈 길
독자적인 기술 개발과 우리 사정에 특화된 기술표준의 수립, 나아가 우리 기술표준의 국제표준화는 미래 첨단기술 중심의 산업 육성에 더없이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섣불리 국제기준과 유리된 기술표준을 채택하는 것은 불편과 비효율의 문제를 넘어 심하면 국내 산업을 고사시키는 위험까지 수반한다.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사상 최초로 남녀 모두 빙속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쾌거는 한국민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제 한국 선수의 역량은 겨울올림픽에서 한국형 종목이라고 생각한 쇼트트랙뿐만 아니라 명실상부하게 국제기준이 인정되는 피겨스케이팅에 이어 빙속까지 한국을 강국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세계가 인정하는 국제기준 속에서 경쟁하고 노력하는 일. 앞으로 산업계를 키우기 위해 우리의 기술표준이 가야 할 방향이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