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왕벚나무동산’대본 ★★★☆ 연기 ★★★☆ 무대 ★★★★☆
안톤 체호프의 연극 ‘벚꽃동산’을 한국적 배경과 정서로 녹여낸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왕벚나무동산’. 12개의 긴 의자를 통해 등장인물의 물리적 공간과 심리적 공간을 함께 담아낸 무대연출은 11개의 등받이 의자를 활용해 같은 효과를 끌어낸 같은 극단의 ‘보이첵’을 연상시킨다. 사진 제공 코르코르디움
그렇다면 왜 하필 극장에 비유했을까. 베이컨이 살던 시대는 영화를 발명하기 전이므로 여기서 극장은 당연히 연극공연장을 뜻한다. 베이컨의 4대 우상론이 실린 ‘신기관(新機關)’에 따르면 극장에서 상연되는 연극은 사실이 아님에도 진짜보다 더 진짜 같고, 더 우아하고, 더 신나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러한 어원과 관계없이 전통과 권위를 우상시하는 ‘극장의 우상’이 정작 연극현장에서는 어떤 식으로 출현할까. 고전작품을 무대화하면서 전통적 분석과 권위적 해석에만 안주할 때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공연 내내 낯선 러시아어 대신 ‘문디이’(친한 사이끼리 상대를 부르는 호칭) ‘천지삐까리’(많다) ‘남구’(나무) 등 질펀한 경상도 사투리의 향연이 펼쳐진다. 러시아 서커스를 오광대놀이로, 러시아 농노해방을 갑오경장으로, 프랑스어는 일본어로 독일어는 중국어로, 케르치산(産) 청어를 간고등어로, 그리고 톨스토이의 ‘죄 많은 여인’을 윤동주의 ‘자화상’으로 바꿔친 재치가 볼 만하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와 그 곡이 멜로디를 빌려온 왈츠곡 ‘다뉴브강의 잔물결’을 절묘하게 병치해 한국적 서구화를 포착한 감각도 세련되다.
체호프의 고전 과감히 해석
미학적 창의성 돋보이지만
‘노스탤지어’ 형상화 실패
원작의 묘미 제대로 못살려
이런 외형을 능가하는 것은 “내 작품은 본질적으로 코미디”라고 말한 체호프 자신의 해석을 능동적으로 끌어낸 무대연출과 연기에 있다. 연극은 과거에 사로잡힌 채 현실을 직시 못하는 지주 권윤애(김미령) 권재복(이상일) 남매나 그 집안의 종이었지만 신흥부자가 돼 동산을 차지하는 천용구(권재원), 그리고 과거를 상징하는 권씨 남매와 현재를 대표하는 천용구를 비판하며 미래를 꿈꾸는 만년대학생 방혁완(천재홍)을 희화화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말을 쏟아낼 뿐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법 없는 에고이스트이자 말과 행동, 겉과 속이 어긋나는 광대들이다.
이들의 광대놀음을 극대화하는 것이 12개의 긴 의자다. 때로는 기차역 대합실, 때로는 대저택, 때로는 그 정원, 그리고 잔치가 열리는 거실 바깥문으로 변신을 거듭하는 이 의자는 이들의 이율배반적인 심리적 공간을 형상화해낸다. 이 작품의 가장 창의적 요소다.
2만∼2만5000원. 14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02-889-3562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