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동아일보에서 취재하러 왔다는 얘기를 듣고 파리 일대에 살고 있는 6·25 참전용사 들이 승용차와 기차 등을 타고 지난달 19일 파리 시내의 한식당에 모였다. 포즈를 취해달라고 하자 ‘역전의 용사들’은 “김치!”를 외치며 환하게 웃었다. 이들은 “축구경기 때도 한국팀을 응원한다”며 팬으로서의 열정을 보여줬다.
1·4후퇴 직후 최전선 배치
3421명 참전 269명 사망-실종
“당시엔 한국의 미래에 회의적
지금의 발전상에 찬사 보낸다”
이들은 프랑스의 6·25전쟁 참전용사들의 모임인 한국전쟁참전용사회 회원. 한국의 동아일보에서 취재를 왔다는 얘기를 듣고 파리와 근교에 살고 있는 회원 30여 명 가운데 16명이 모인 것이다.
60년 전 10대 후반과 20대 초반 청년이었던 이들에게 전쟁은 낯설지 않았다. 제1, 2차 세계대전의 무대였던 프랑스 젊은이들은 전쟁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생 독립국 ‘코레(Cor´ee)’는 미지의 세계였다.
“한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어. 군 복무 중이어서 지원했는데 한국이란 나라를 지도에서 처음 찾아봤지.” 앙리 라무슈 씨(82)의 말에 옆자리의 마르셀 브누아 씨(80)도 거들었다. “인도차이나전쟁을 다녀온 뒤였는데 친구들이 ‘한국은 인도차이나만큼 덥지는 않다’고 하더군. 내가 자원한 것은 그게 이유였어.”
프랑스대대는 마르세유 항을 출발한 지 36일 만인 1950년 11월 29일 부산항에 도착해 1·4후퇴 다음 날인 1951년 1월 5일 전선에 배치됐다. 이후 지평리전투(1951년 2월 13∼15일), ‘단장의 능선’ 전투(1951년 9월 13일∼10월 13일), ‘화살머리 고지’ 전투(1952년 10월 6∼10일) 등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대부분 세계대전과 인도차이나전쟁을 겪은 베테랑들이었지만 혹독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까지 세 차례 3개 대대를 교체하며 연인원 3421명이 참전한 프랑스군의 인명 피해는 전사 262명, 부상 1008명, 실종 7명이다. 참전용사의 3분의 1 이상이 사상자가 되거나 실종된 것이다. 세르주 아르샹보 씨(80)는 “1952년 2월 중공군의 포격을 받았을 때 바로 앞에 있던 동료는 로켓포를 허리에 맞아 몸이 두 동강 났고 바로 뒤에 있던 동료도 쓰러졌다. 포격이 끝난 뒤 온전한 사람은 나뿐이었다”고 회고했다.
낯선 한국 땅에서 생과 사를 넘나들었던 용사들에게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자크 그리졸레 씨(80)가 시원스러운 답을 줬다.
피에르 마비요 씨(82)는 “한국인들이 한국전쟁 이후 이뤄낸 모든 것에 찬사를 보낸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을 무한한 자랑으로 여긴다”며 “프랑스는 나의 조국, 한국은 두 번째 조국”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참전용사회의 현재 회원은 366명으로 직접 참전한 용사가 151명이고 나머지는 유족들이다. 프랑스에는 인도차이나전쟁, 알제리전쟁 등 참전자들이 많지만 참전용사회란 조직이 구성돼 있고, 정례적인 모임을 갖는 것은 한국전쟁참전용사회가 유일하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묻자 스타니슬라스 살리츠 씨(79)는 “한국전쟁은 프랑스혁명 전사의 후손으로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와 자유를 위해 싸운 고귀한 전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레지스탕스 영웅’ 3성 장군, 중령급 대대장 자원해 중공군 격파 ▼
몽클라르 장군 딸 회고록 집필
6·25전쟁 때 프랑스 대대 지휘관이었던 랄프 몽클라르 장군의 딸 파비엔 뒤푸르 씨. 파리 외곽도시 르페크의 집에는 몽클라르 장군이 6·25 때 추위를 견뎌내려고 군복 위에 입었던 양모조끼 등이 눈에 띄었다. 군인의 딸로 자란 그녀는 군인과 결혼했다.
몽클라르 장군은 프랑스의 전쟁영웅이었다. 육군사관학교인 생시르 4학년 생도 시절인 1914년 소위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엔 프랑스군이 독일군을 상대로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나르비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본명은 라울 마그랭베르느레인데 나치 치하 레지스탕스 활동 때 암호명으로 쓰던 몽클라르로 개명했다.
1950년 8월 프랑스 정부가 미군 2사단 산하의 파견 부대 창설을 발표하자 3성(星) 장군이었던 몽클라르 장군(당시 58세)은 중령급인 지휘관을 지원했다. 상부에선 “장군이 어떻게 대대장을 맡느냐”고 만류했지만 그는 “계급은 중요하지 않다. 곧 태어날 자식에게 유엔군의 한 사람으로서 평화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몽클라르 장군이 72세 때인 1964년 각종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했을 때 딸 뒤푸르 씨는 겨우 열 세 살이었다. 하지만 딸의 뇌리에 아버지는 평생 군인으로 깊이 각인돼 있다.
“아버지는 종종 ‘나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참전했다. 평화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한국전쟁은 반드시 참전했어야 했던 전쟁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정당한 명분을 위해서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게 그분의 인생관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또 한국인들의 인내심을 높이 평가했어요. 아마도 한국인들이 36년이라는 긴 일제강점기를 이겨내고 독립을 쟁취했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뒤푸르 씨는 최근 아버지의 일대기를 다룬 600여 쪽 분량 책의 집필을 마쳤다. 장군의 기고와 글, 편지, 딸에게 들려줬던 얘기들을 담았는데 특히 장군이 지휘했던 지평리 전투를 자세히 다뤘다. 당시 프랑스군은 중공군 3개 사단에 완전히 포위된 상황이었으나 사흘간 전 장병이 철모를 벗어던지고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채 백병전을 벌여 중공군을 격파했다. 유엔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였다. 몽클라르 장군은 “‘베르됭전투’(제1차 세계대전 때 가장 치열했던 전투)와 비슷했다”고 회고하곤 했다.
뒤푸르 씨는 6·25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당부를 잊지 않았다.
“한국의 발전과 평화는 많은 희생을 치르고 얻어진 것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 어떻게 싸웠는지를 기억해주세요.”
▼ “전우 강호근 씨를 찾습니다” 철원 정찰부대 근무 브뢰유 씨 회고 ▼
전장에서 함께한 로베르 브뢰유 씨(오른쪽)와 강호근 씨. 사진 제공 로베르 브뢰유 씨
브뢰유 씨는 1952년 10월 6∼10일 강원 철원 서북방 15km 지점 화살머리(Arrowhead) 고지에서 벌어진 전투 상황을 기록한 글을 보내왔다.
“10월 6일, 달도 없는 고요한 밤. 연발포탄이 비처럼 우리 진지에 쏟아졌다. 폭격은 며칠이나 계속됐다. 우리는 겨우 수백 명이었고, 그들(중공군)은 수천 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저항’ 명령을 받았다. 중공군의 서울 진격로를 차단하라는 의미였다. 선발대는 거의 전멸했다. 탄약이 떨어져 칼과 괭이로 유격전을 벌였다. 10월 10일, 우리 측 공군이 중공군 진지를 폭격했다.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서울을 지켜낼 수 있었다.”
▼ “美폭격기가 드럼치듯 폭탄 쏟아붓고
흰옷 입은 인파 ‘하얀 강’ 이뤄 南으로” ▼
헝가리 종군기자 메러이씨 증언
제2차 세계대전 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매일 이어지는 폭격과 시가전, 즐비하게 쌓이는 시신들을 목격했지만 6·25는 더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는 “같은 언어를 쓰는 민족이, 자신들이 전혀 원치 않은 전쟁을 하면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서로 죽고 죽이는, 유례가 없는 가장 비극적인 전쟁이었다”고 말했다. 메러이 씨는 1956년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파리로 이주했다.
글·사진 파리·르페크=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