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여우주연상을 받은 샌드라 불럭 역시 \'베스트 드레서\'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비글로 감독과 불럭이 입은 것과 같은 실루엣의 드레스는 이번 시상식 레드카펫 패션의 \'대세\'로 꼽힌다. 사진제공 AP연합.
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닥 극장에서 열린 제 8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장의 레드카펫은 시계 바늘을 뒤로 돌린 듯한 모습이었다.
수 십 년 전 사교 파티에서나 입었음직한 보수적이고 조신한 디자인의 드레스들이 레드카펫에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다. 가슴의 계곡을 드러내는 그 흔한 '클리비지룩'이나 다리 라인을 노출시키는 '섹시룩'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양면테이프, 낚시줄 같은 원시적인 수단들을 동원할지언정 과감한 노출을 시도하는 한국의 최근 레드카펫 풍경과 비교해도 훨씬 더 보수적인 모습이다.
이 행사에 참석한 배우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가슴과 다리 부위를 모두 드러낸 머라이어 캐리가 유난히 튀어 보여 '워스트 패션'으로 꼽힐 정도.
▶ 침체→회복, 드레스도 '경기'를 탄다
드레스를 고르기 전, 여배우들도 눈치작전을 한다. 특히 전 세계 TV를 통해 공개되는 중요한 행사에서 실수 없이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모든 여배우들이 하나같을 터.
게다가 드레스 단추 하나, 피부 모공 하나에 돋보기를 들이대는 패션 매체들이 상대 평가를 일삼다보니 다른 이들이 입을 드레스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눈치작전의 대상이자 목표가 된다.
특히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은 지적인 인물을 최고의 여배우상으로 생각하는 요즘 할리우드 분위기를 고려할 때 시상식 전후의 사회적, 경제적 트렌드를 염두에 두지 않고 드레스를 고르는 것은 위험한 발상으로 통한다.
최근 미국에서 여전히 가장 큰 사회적 이슈로 꼽히는 것은 글로벌 경제위기와 그 여파다. 대다수 미국인들이 대출금 상환과 구직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때, 아무리 톱스타라도 나 홀로 낭만적 분위기를 연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장의 드레스들이 조신한 분위기를 띠게 된 데도 이러한 경제적 여파가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뉴욕타임스, LA타임스 등 미국 언론들은 경제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2008년과 2009년에 비해서는 올해 확실히 밝고 희망적인 모티프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고 전한다.
이들이 꼽은 레드카펫의 변화는 일단 색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난 2년간 약속이나 한 듯 어두운 색상을 택했던 여배우들이 레드, 버터옐로, 화이트, 핑크 등 화사한 색상을 꺼내들었다는 것. 또 영화 '아바타' 흥행의 영향으로 '아바타 블루'라 일컬어지는 짙은 파란색 드레스를 선보인 여배우들도 많았다. 일부 언론은 이렇게 밝은 색상의 드레스가 돌아온 것이 경기 회복의 희망을 담은 메시지라는 거창한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캐스린 비글로 감독은(맨 오른쪽) 여러 면에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의 '트렌드 세터'였다. 같은 브랜드, 비슷한 색상의 드레스를 선택한 케이트 윈슬렛(맨 왼쪽)보다도 더 주목을 받을 정도. 가운데는 비글로와 같은 드레스를 입은 모델 컷. 사진출처:패션룰즈닷컴
▶ 시상식 성격이 드레스 트렌드에도 영향
따라서 올해 드레스 트렌드를 경기 침체보다는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의 특징에서 찾으려는 전문가들도 있다. 특히 이번 시상식에서 가장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두 작품이 '아바타'와 '허트 로커'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번 시상식의 최대 이슈는 '허트 로커'의 캐서린 비글로 감독이 전 남편 제임스 카메룬 감독을 물리치고 아카데미 역사상 첫 여성 감독상 수상자가 된 것이었다. 또 3차원(3D) 입체 블록버스터인 '아바타'와 전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룬 '허트 로커'에서 여우주조연상 후보가 나오지 않는 바람에 작품과 여배우가 함께 주목을 받는 사례가 없었다.
조벡 씨는 "감독상 수상이 일찌감치 점쳐졌던 만큼 비글로 감독 스스로가 '감독상 첫 여성 수상자'라는 위치에 걸맞게 고급스럽고 우아한 드레스를 고르려 했을 것이고 그 소문을 모를리 없는 여배우들이 이러한 추세에 발맞춰 함께 '톤 다운'을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분석대로라면 이른바 '비글로 대세론'이 여배우들을 자극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로 비글로 감독이 선택한 입생로랑의 은회색 드레스는 여러 패션 매체들이 꼽은 '베스트 드레스' 중 하나로 거론됐다. 비글로 감독은 182cm의 큰 키에 여배우들 못지않은 미인형인 덕에 의상을 더욱 빛냈다는 평가도 받았다.
미국의 패션정보사이트 '패션룰즈닷컴'은 "레드카펫에서 역시 같은 브랜드의 같은 색상 드레스를 선택한 톱스타 케이트 윈슬렛보다 비글로 감독이 더 큰 주목을 받는 이상 현상이 일어났다"며 "비글로 감독의 드레스가 대중에게까지 인기를 끌면서 최근 몇 년간 지방시, 발맹 등 경쟁 브랜드들에 밀렸던 입생로랑이 다시 살아나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전하기도 했다.
▶ '비글로' 스타일이 대세?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하듯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에서 비글로와 함께 '베스트 드레서'로 꼽힌 다른 여배우들의 드레스도 '비글로 스타일'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일단 윈슬렛 역시 입생로랑의 은회색 드레스로 호평을 받았다. 또 '블라인드 사이드'로 영화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차지한 샌드라 불럭은 비글로와 유사한 실루엣의 금빛 드레스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영국의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 마체사가 제작한 이 드레스 역시 노출이 거의 없는 우아한 스타일.
반대로 '워스트 드레스'라는 평을 받은 드레스는 공교롭게도 '비글로 스타일'과 동떨어진 디자인들이었다. 여성성을 '은근한 우아함'이 아닌 '과장된 표현'으로 연출한 것들이다.
이번 시상식에서 패션 전문가들 사이에 거의 만장일치로 '워스트 패션'으로 꼽힌 샤를리즈 테론의 디오르 쿠튀르 드레스는 가슴 부위에 두 개의 커다란 장미꽃 모양 장식이 있는 디자인이다. '말 안해도 알 수 있는 가슴의 위치를 일부러 적나라하게 표시해 당혹스럽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제니퍼 로페즈가 입은 아르마니 프리베의 옅은 핑크색 드레스는 엉덩이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해 어색해 보인다는 이유로 '워스트'에 올랐다. 일부 언론은 "로페즈는 (치마 때문에 자리가 좁아) 의자가 2개는 필요하겠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심지어 '패셔니스타'로 통하는 '섹스 앤더 시티'의 주인공 사라 제시카 파커가 선택한 레몬색 샤넬 쿠튀르 드레스마저 '워스트'로 회자되는 치욕을 맞았다. USA투데이 등은 넉넉한 품이 특징인 이 드레스를 '마치 노란색 자루를 뒤집어 쓴 것 같다'고 평가했다.
특별히 문제가 없어 보이는 드레스에마저 혹평이 이어진 것은 '비글로 대세론'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일까.
첫 감독상 여성 수상자로 파워를 자랑한 비글로 감독이 콧대 높은 여배우들 사이에서 '트렌드 세터'로까지 군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아 흥미로운 레드카펫을 보는 또 다른 재미가 될 것 같다.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