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뜻하는 한자인 ‘술 주(酒)’자에서 ‘물 수(水)’변을 떼어낸 글자는 고대인들이 사용한 토기 모양에서 유래한 상형문자다.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빗살무늬 토기의 표면에 그려진 빗금은 비와 햇살, 바람 등을 상징한다. 모두 술의 발효에 영향을 주는 자연요소다. 술잔이 단순히 술 마시는 도구가 아니라 술을 저장, 숙성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와인 애호가들은 종종 “내가 마시는 포도주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잔은 보르도에도, 부르고뉴에도 없다”는 말을 한다. 술이 가진 진정한 맛과 향을 음미할 때 잔이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케 하는 말이다. 술과 술의 ‘절친’인 잔에도 궁합이 있다는 얘기다.》
■ 술맛 더하는 술잔 이야기
○ 포도품종이 잔 모양 결정
와인 잔은 크게 4가지로 구분된다. 레드와인 잔은 볼(와인을 담는 부분)이 깊고 입구가 넓은 보르도 스타일과 볼 부분을 넓힌 부르고뉴 스타일로 나뉜다. 이 외에 보르도 스타일에서 크기만 줄인 모양의 화이트와인 잔과 주로 ‘샴페인 잔’으로 쓰이는 스파클링와인 잔이 있다. 부르고뉴 스타일은 향이 섬세하고 화려한 포도 품종인 ‘피노누아르’의 특성을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와인이 공기와 닿는 면적을 넓힌 모양이다. 반면 화이트와인 잔은 술이 공기와 닿는 면적을 줄여 온도가 올라가는 것을 막고 와인의 산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크기가 작고 잔의 입구도 좁다.
맥주는 거품의 양과 밀도, 향에 따라 적합한 잔이 다르다. 풍성한 거품이 일품인 ‘에일’이나 ‘프리미엄 라거’ 맥주는 잔에 따를 때 소용돌이가 생겨 촘촘하고 풍부한 거품이 나도록 잔의 입구보다 몸통이 넓은 ‘튤립’ 형태의 잔을 고르는 게 좋다. 술의 색이 맑고 탄산 함유량이 높은 편인 ‘필스너’나 ‘라거’ 맥주는 길고 가는 잔과 찰떡궁합이다. 눈으로 잔을 따라 오르는 기포 흐름을 좇는 즐거움도 크고 오랫동안 거품을 유지할 수 있다. ‘호프잔’으로 불리는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큼직한 손잡이가 달린 술잔은 ‘다크라거’ 같은 맥주를 즐기기에 그만이다.
○ 음용온도 따라 재질 달라져
마시기 적합한 술의 온도가 술잔 재질을 정할 때도 있다. 데워 마시는 사케는 온도 유지가 중요하므로 도자기나 주석 소재의 볼륨감 있는 잔이 좋다. 차갑게 마시는 사케는 큰 잔에 따라 홀짝홀짝 마시면 술의 온도가 변해 첫 모금에서 느낀 숙성감을 느낄 수 없으므로 작은 잔을 택한다.
사케는 맛과 향의 무게에 따라 쿤슈(薰酒), 소슈(爽酒), 준슈(醇酒), 주쿠슈(熟酒) 등으로 나뉜다.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일식당 ‘스시조’의 이희종 지배인은 “도수가 낮고 새콤한 맛이 특징인 쿤슈는 잔의 윗부분이 살짝 벌어진 잔이나 화이트와인 잔이, 가볍고 상쾌한 맛이 특성인 소슈는 소주잔처럼 작은 잔이 적합하다”고 말한다. 진한 곡물향과 농후한 맛이 특징인 준슈는 볼륨감과 깊이가 있는 잔이, 숙성주라서 맛과 향이 무거운 주쿠슈는 브랜디 잔이 어울린다. 시음용으로는 잔 바닥에 그려진 청색 선으로 술의 투명도를 평가하는 ‘기키초코’란 이름의 잔을 사용한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네 계영배
수도사들을 위한 성배처럼 레페잔
■ 사연을 담은 술잔들
바텐더는 바에 앉은 미모의 중년 여성에게 차갑게 식힌 샴페인을 내놓는다. 술에 해박한 바텐더답게 샴페인을 담아내는 잔은 가늘고 긴 모양의 ‘플루트 글라스’다. 샴페인 기포가 솟아오르는 것을 감상하기에도 좋고 긴 다리(스템) 덕분에 손의 체온이 술의 냉기를 빼앗는 것도 막아주는 적합한 잔이다. 하지만 손님은 “이런 것은 마실 수 없다”면서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바텐더에게 선배 바텐더는 “잔이 문제였다”는 지적을 한다. 플루트 글라스는 샴페인의 기포 감상이나 온도 유지에는 그만이지만 술잔을 비우려면 길쭉한 잔의 모양 때문에 목을 많이 젖힐 수밖에 없고 그러면 여성의 목에 난 주름(나이를 감출 수 없는 대표적인 신체 부위)이 드러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 1990년대 일본의 와인 붐 조성에 일조한 만화 스토리 작가 아라키 조의 작품 ‘바텐더’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 원산지에선 외면 받는 샴페인 잔
하지만 쿠프 글라스는 그 납작한 모양 때문에 샴페인의 기포를 감상하기에 적절치 않은 데다 온도 변화에 민감하고 결정적으로 잔에 따를 수 있는 와인 양이 너무 적어 와인의 맛과 향을 살리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샴페인의 원산지인 프랑스 샹파뉴 지방 사람들조차 쿠프 글라스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샹파뉴 사람들이 선호하는 와인잔은 작은 튤립 모양의 화이트와인잔이다.
술을 처음 빚은 장소가 잔의 모양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벨기에 남부도시 디낭에 위치한 ‘레페 수도원’에서 순례자와 수도사를 위해 빚었던 것이 기원인 레페 맥주의 전용잔은 성배(가톨릭 미사 때 포도주를 담는 잔) 모양을 하고 있다. 애초 성배 모양의 전용잔은 봉헌의 의미와 신성함을 상징했었다. 이 잔은 입구가 넓은 특유의 모양 덕분에 맥주 향의 발산을 도와 미세한 향까지 깊이 들이마실 수 있어 오랜 시간 특유의 향을 즐길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 과하지 않게, 탈나지 않게
잔이 넘치도록 술을 가득 부어 즐기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애주가들의 애를 태우는 술잔도 있다.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의미의 ‘계영배(戒盈杯)’라는 술잔은 술을 7분 이상 따르면 따르는 대로 모두 술잔 밑으로 흘러내려가 버린다. 고대 중국에서 과욕과 과음을 경계하는 의미로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이 잔은 ‘술을 줄이게 만드는 잔’이라고 해서 ‘절주배(節酒杯)’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실학자 하백원 등이 이 잔을 만들었다고 하며 몇 년 전 국내 요업계에서도 계영배 재현에 성공했다. 절주의 미덕이 요구되는 애주가용 선물로 권할 만하다.
소리가 나는 소주잔도 있다. 우리나라 3대 도자기업체 중 하나인 광주요는 몇 년 전 ‘화요’라는 증류식 소주를 만들면서 잔을 받치는 높은 굽 속에 방울을 넣어 잔을 흔들면 ‘딸랑딸랑’ 맑은 소리가 나는 전용잔을 함께 선보였다. 백제나 가야 등 고대 왕국의 무덤에서 발견된 ‘영부배(鈴付杯)’란 이름의 토기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잔이라는 설명이다. 고대 왕국에서는 방울 소리로 귀신을 쫓으려는 주술적인 목적으로 이 술잔을 만든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술을 마시는 흥취를 돋워주는 목적으로 쓰인다.
때로는 술잔과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식기가 술잔으로 쓰이기도 한다. 경북 안동시에서는 종종 밥그룻 뚜껑이 안동소주잔으로 변신한다. 그 이유도 그럴싸하다. 소주, 특히 증류 방식으로 빚는 안동소주는 다른 술보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데 자칫 차게 마셨다가는 독한 술기운에 탈이 날 수 있다는 것. 그런데 밥의 온기가 남아 있는 밥그릇 뚜껑에 소주를 따라 마시면 차가운 소주의 한기가 밥그릇 뚜껑 위에서 중화되는 이른바 ‘거냉(去冷)’ 효과를 볼 수 있다. 큰 술잔이나 별 안주 없이 큰 그릇에 술을 따라 마시는 일을 뜻하는 ‘대포’라는 단어에 숨어 있는 뜻도 흥미롭다. 대포에는 크게(大) 베풀다(布)는 의미가 있는데, 조선왕조 세종 치세 당시 유생들이 상소문에 “천하가 대평하니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을 명절 삼아 대소 관료들이 ‘크게 베풀어’ 마음껏 마시고 즐기게 해달라”고 청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술의 종류에 따른 잔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 술 사케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세계 최고급 와인잔 메이커인 ‘리델’사는 와인잔 모양의 사케 시음잔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잔은 일본 전역의 유명 사케 양조가 및 전문가 등과 함께 30여 차례에 이르는 ‘글라스 테이스팅’을 거쳐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통상적으로 사케를 마실 때 쓰이는 도자기나 나무로 만든 잔에 비해 사케 향을 잘 피어나게 하고 사케의 종류에 따른 미묘한 투명도와 색감의 차이를 구분하는 데 적합해서 기키사케시(일본술 전문가)가 사케의 맛과 향을 구별하는 훈련을 할 때 주로 쓰인다.
글=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디자인=공성태 기자 coon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