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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영 칼럼]우리를 ‘점프’하게 하는 사회

입력 | 2010-03-16 03:00:00


훌륭한 장서가에 비한다면 내 서재의 책은 초라한 편이다. 그런데도 나는 종종 내 서가에서 필요한 책을 찾아내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책의 정리 배열방식이 무질서하기 때문이다. 이 무질서는 내 정신의 내면적 지적 무질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만 같아 곤혹스럽다. 이런 무질서는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대형 서점에서도 비슷하다. 그런데도 점원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빨리 문제의 책을 찾아낸다.

반면에 프랑스의 서점에서는 모든 책이 예외 없이 저자명 알파벳순으로 정확하게 배열되어 있다. 나는 꼭 필요한 책이 없을 때에도 어떤 새로운 책이 더 출판되었는지 살펴보며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가게에 혼자 들어간 기분이 되어 이 고요하고 풍요로운 지적 여행을 만끽한다. 혼자만의 여행이 가능한 것은 거기에 만인이 공유하는 객관적 질서, 혹은 분류방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년 어느 날 산골짜기의 우리 집 벽에 번지 판이 와 붙었다. 검디길 100. 자연 속에 방치되어 있던 우리 집이 드디어 지방행정의 공간질서 속으로 편입된 것이다. 그런데 어디에도 99번지나 101번지는 없다. 이런 길 이름과 번지 표시는 과연 일정한 기호학적 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것일까? 더구나 현장에 표시된 도로명과 번지가 지도상에 동일하게 표시되지 않는 한 실용성은 떨어진다.

세상의 모든 길은 다른 길과 만나거나 되돌아 나와야 하는 막다른 길이다. 그 길의 좌우를 짝수와 홀수로 나누어 10진법에 따른 순서를 매기는 일이 왜 우리에게는 그리도 어려웠을까? 만인에게 공통된 객관적 정보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은 데 원인이 있는 이런 무질서는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사회 속에서는 비능률과 불편의 원인이 된다.

시험도 책도 과정없이 답만 좇아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의 정보체계의 무질서와 내면적 혼란을 일거에 극복하는 방식이 등장했으니 바로 전자정보검색 시스템의 개발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대형 서점에서도 진열된 서적의 공간적 위치를 신속하게 찾고 내비게이터를 통하여 주소나 전화번호 하나로 목적지를 찾는다. 이는 객관적 순차적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정보교환에 있어 서구의 여러 나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우리에게 과정을 생략하고 필요한 정보에 바로 접근하는 놀라운 ‘점프’의 기회를 제공한다. 실제로 우리는 이 새로운 정보시스템을 가장 저돌적으로 향유하는 국민이 되었다.

본래 우리는 과정을 생략하고 신속한 ‘정답’과 단순한 ‘결론’으로 점프하는 것을 유난히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각급 학교의 시험에도 객관적인 기계채점이 가능한 단답형 선다형의 문제가 주로 출제된다. 이에 위기를 예감한 교육당국이 전에 없던 논술이라는 서술형 시험을 고안해냈으나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에 비긴다면 초보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도 학교나 수험생이나 다 논술을 기피한다.

강연이나 강의에서도 논리적인 설명이 길어지면 청중은 빨리 지루해하며 미분화된, 따라서 지적으로는 거의 폭력적인 단답형 결론을 요구한다. 고비용으로라도 족집게 과외를 받고자 하고 심지어는 불법으로라도 시험문제와 정답 자체를 유출한다. 긴 논리적 설명보다는 재치 있는 개그를, 복잡한 소설보다 비약이 많은 시를 선호한다. 이런 모든 현상이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로 점프하려는 욕구의 반영이다.

사실 지정학적 상황은 우리를 점프하는 국민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외국에 갈 때 도정을 헤아리며 목적지에 이르지 않는다. 교통기관과 관련이 있다. 선박을 이용하는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 해외여행은 항공편이다. 비행기는 긴 중간과정, 즉 여정을 생략하고 출발점으로부터 도착점으로 점프하게 한다. 나의 여행에 과정은 없고 목적지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한 번도 기차나 버스나 자동차를 타고 창밖 풍경을 내다보며 국경을 넘어 본 적이 없는 국민이다.

복잡한 모순의 세상사 어찌 풀까

과정을 생략하고 곧바로 정답이나 목표에 이르도록 해주는 저 마술 같은 인터넷 검색창을 가진 우리는 행복하다. 이 해결책은 ‘빨리 빨리’를 좋아하는 우리에게는 요술방망이와도 같다. 그러나 세종시와 같은 난제를 앞에 둔 우리는, 그리고 인문학의 붕괴 혹은 빈곤을 우려하는 우리는 베스트셀러, 그중에서도 정답에 빨리 도달하는 비결을 가르쳐 주는 자기 계발서적만을 유난히 선호하는 우리는, 자신은 TV 앞이나 골프장에 가 있으면서 자녀에게는 독서하라고 시키는 우리는, 삶은 모순에 가득 차고 날로 복잡해져 가는데 관계대명사가 없이 단순 명쾌한 접속사가 우세한 언어구조를 가진 우리는, 과정을 생략하는 점프 사고의 첨단적 환경을 마냥 행복해할 수는 없다.

순차적인 과정, 논리적인 관계, 모순의 극복 방식을 생략한 채 흑백 논리나 양자택일의 마지막 목표로 준비 없이 점프하려는 것은 반인문학적 사고, 아니 비공화적 사고다. 인생은 과정이지 목표가 아니지 않은가?

김화영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