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대표적 다문화도시개방 - 다양성의 뿌리 캔다
인천 중구 송학동 자유공원 내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자리에 있었던 존스턴 별장. 영국인이 발주하고 독일인이 설계 했으며 중국인이 시공한 국제적 건축물이었다. 사진 제공 인천학연구원
19일 청-일 조계지 경계길에서 만난 인천학연구원의 김창수 상임연구위원은 “근대화와 문화 혼종의 도시로서의 인천을 가장 잘 설명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인천학연구원은 인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2002년 2월 인천대가 부설연구기관으로 설립했다. 출발은 단출했다. 지역학 연구를 위한 연구비(연간 약 1억5000만 원)를 시에서 지원받는 조건으로 8여 년을 ‘1인 상임연구위원 체제’로 운영했다. 대신 인천학 연구에 관심 있는 인문·사회과학자들의 논문을 공모해 ‘인천학 연구’라는 학술지로 만들어 연구 결과를 축적했다. 이 학술지는 서울을 제외한 지방연구학술지로는 처음으로 작년 말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평가에서 인문학 분야 ‘등재 후보지’가 됐다. 2년간 현 수준을 유지하면 정식 등재지가 된다. 그만큼 인천학연구원이 등재 논문의 수준을 높게 유지했다는 의미다.
논문 전국 공모로 성과 축적
내재적 근대화에도 관심 18세기 ‘강화학파’ 연구100여 년 전 영어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했던 중국식 건물 앞에서 김창수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이 인천의 개방성과 혼종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작은 사진은 1904년 호주사진가 조지 로즈가 찍은 제물포항. 오른쪽은 중국 조계지고, 왼쪽은 일본 조계지다. 인천=허진석 기자
근대화를 일찍 시작한 인천의 단면은 지역에서 구술로 전해오는 이야기 속에도 있었다. 인천문화연구원의 구술자료에 대한 자문에 응하고 있는 김윤식 인천문인협회장은 “당시대를 살았던 어른들로부터 들은 얘기 중에는 ‘냉면을 전화로 주문받아 자전거로 배달’하는 얘기도 있다”며 “오늘날과 같은 상업적인 음식점이 제물포에서 시작된 셈”이라고 말했다. 1900년대 초 당시의 최신 유행은 서울의 명동이 아닌 제물포에 있었는데 서울의 한량들이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을 타고 제물포에서 놀지 않으면 명함을 내밀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다.
인천학연구원은 외세에 의한 근대화뿐만 아니라 내재적 근대화의 맹아로 볼 수 있는 강화학파도 연구하고 있다. 강화학파는 하곡 정제두(1649∼1736)를 중심으로 한 조선 후기의 양명학을 받들던 모임으로 이후 북학파에도 영향을 미쳐 한국의 근대화와 연결돼 있다. 인천학연구원은 강화학파 연구를 위해 강화역사문화연구소와 같은 외부 연구단체와 연계(네트워킹)를 맺고 있다. 공동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방식 등으로 인천학 연구에 필요한 자양분을 흡수하고 있는 것. 김형우 강화역사문화연구소장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강화학파는 열린 정신으로 학문을 했던 선비들”이라며 “이들의 개방성을 오늘날 교류와 혼종의 특성을 보이는 인천의 개방성과 연결지을 수 있는지는 또 다른 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재적 근대화에도 관심
18세기 ‘강화학파’ 연구
인천학연구원은 인천에 관한 근대기 신문기사를 자료집으로 묶고 당시 인천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발간된 ‘조선신문’의 색인 작업을 하는 등 인천학 연구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기초자료 구축 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인천=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