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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춘향을 닮은 미스 사이공

입력 | 2010-03-23 03:00:00

뮤지컬 ‘미스 사이공’
노래 ★★★★ 연기 ★★★☆ 무대 ★★★




 20일 개막한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두 번째 한국어 공연에서 주인공 크리스와 킴 역으로 새로 발탁된 이건명 씨와 임혜영 씨가 사랑의 이중창을 부르고 있다. 사진 제공 KCMI

에스프레소 커피는 수백만 번의 실험을 거쳐 탄생했다. 90∼92도의 온도와 m²당 9kg의 수압을 지닌 물에 곱게 간 커피 8∼9g을 20∼25초가량 적셔서 20% 농도로 추출했을 때 최적의 풍미를 낸다는 과학적 연구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에스프레소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타기도 하고 거품을 내기도 한다.

뮤지컬도 마찬가지다. 각 배역에 딱 맞는 음색이 있다. 새로 작품이 올라갈 때마다 매번 오디션을 실시하는 것은 제작진의 귀가 갈구하는 음색을 찾아서다. ‘미스 사이공’의 킴 역이 대표적이다. 앳되면서도 고음을 소화할 수 있는 호소력 있는 목소리. ‘레미제라블’의 에포닌이나 디즈니 애니메이션 뮤지컬 ‘인어공주’의 아리엘에 어울릴 음색이다. 2006년 초연에 이어 2010년 공연에서도 킴 역으로 발탁된 김보경이 바로 그런 음색을 지녔다. 게다가 아담한 동양적 체구까지 적역이다. 하지만 모든 관객을 만족시킬 순 없다.

임혜영의 발탁은 그렇게 다른 취향을 고려한 선택으로 보인다. 김보경의 킴이 에스프레소라면 임혜영의 킴은 카푸치노다. 중저음에선 비슷한 음색을 내지만 고음에선 거품방울이 섞인 음색을 낸다. 상대적으로 늘씬한 키와 커다란 눈망울도 다른 느낌을 준다. 김보경의 킴이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참새 같다면 임혜영의 킴은 독립심 강한 제비를 닮았다.

그렇게 킴에 대한 연민을 살짝 걷어내고 본 ‘미스 사이공’은 놀랍게도 ‘춘향전’과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미군 병사와 사랑에 빠진 베트남 창녀의 이야기를 담은 ‘미스 사이공’은 얼핏 일부종사의 유교적 정절을 강조한 ‘춘향전’과는 대척점에 놓인 것처럼 느껴진다. 춘향이 기생이란 사회적 신분을 거부하고 반가의 여인이 되는 반면 킴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스스로 윤락녀가 된다는 점에서 ‘반(反)춘향’이라 할 수도 있다.

주체적으로 운명 선택한 킴
‘온실속 난초’ 나비부인보다
‘야생화’ 춘향에 더 가까워


하지만 어린 시절 불장난일지언정 자신이 선택한 사랑에 대해 죽음까지 불사하는 주체적 여인으로서 춘향을 바라보면 두 작품은 너무도 닮은꼴이다. 킴이 자신의 사랑으로 스스로 선택한 미군 크리스(마이클 리·이건명)는 이몽룡이고, 크리스가 떠난 뒤 공산화된 베트남 장교로서 권력의 힘을 빌려 킴의 사랑을 강요하는 투이(이경수)는 변학도다.

모진 고문과 학대에도 자신이 선택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킴과 그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등불이 크리스라는 점도 춘향전의 구도를 빼닮았다. 크리스가 미국 여인과 결혼해 킴 앞에 나타나는 장면은 거지꼴을 한 몽룡이 옥에 갇힌 춘향을 찾아오는 장면과 겹쳐진다. 그 지점에서 ‘춘향전’이 극적 반전을 택하고 ‘미스 사이공’이 비극을 직시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자 킴과 크리스의 만남을 매개하는 엔지니어(김성기·이정열)는 방자와 향단, 월매가 합쳐진 캐릭터로 비쳤다.

물론 ‘미스 사이공’은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토대로 했다. 하지만 전쟁과 굶주림, 고문까지 이겨낸 킴은 온실 속 난초를 닮은 ‘나비부인’의 초초상보다는 야생화를 닮은 춘향에 가깝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베트남에도 우리의 춘향전을 닮은 ‘낭 쑤언 흐엉’이라는 설화가 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이 유교건 자본주의건 공산주의건 외부로부터 주어진 이념을 거부하고 자신이 선택한 운명의 굴레를 짊어지고 가는 킴은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니다. 여인의 얼굴과 어머니의 이름을 지닌 시시포스다. 2만∼12만1000원. 4월 4일까지 고양 아람누리, 4월 16일∼5월 1일 성남아트센터, 5월 14일∼9월 12일 서울 중구 흥인동 충무아트홀. 02-518-7343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