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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자금 381조… 넘치는 돈, 갈 곳이 없다

입력 | 2010-03-24 03:00:00

힘 받는 금리인상론…시기상조론 뛰어넘을까
과도한 저금리인데도 실물경제로 흘러가지 않아
요구불 예금-MMF-공모주 청약 등에 쏠림 심각





“마땅히 돈을 굴릴 곳이 없어 당분간은 투자 활동을 접고 쉬고 싶어요.”

주식과 펀드에 40억 원 넘게 투자했던 김모 씨(61)는 22일 수십 개에 이르던 펀드를 모두 정리하고 환매액을 투자대기성 금융상품인 머니마켓펀드(MMF)에 넣었다. 대부분 2007년 가입했던 펀드들로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에 마이너스 수익률을 보이다 최근 원금을 간신히 회복한 것들이다. 원금의 20% 정도가 깎인 중국 관련 펀드 2개도 어느 정도 회복됐다 싶으면 곧바로 처분할 계획이다.

올해 들어 주식 수익률이 하락하고 부동산가격도 ‘대세 하락기’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김 씨의 돈처럼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단기 부동(浮動)자금이 급증하고 있다. 특히 초저금리의 영향으로 시중의 단기 유동성은 380조 원을 훌쩍 넘어 특단의 유동성 관리 대책이 강구되지 않는 한 시중자금의 왜곡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시중자금은 이미 갈 길을 잃은 모습이 역력하다. 단기금융상품인 MMF에 몰리는 돈만 봐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주에만 3조5000억 원이 넘는 돈이 순유입되는 등 7주 연속 증가하고 있다.

은행 예금도 무서운 속도로 시중자금을 끌어모으고 있다. 지난달 25일 기준으로 국민 신한 우리 하나 기업 외환 등 6개 시중은행의 총 수신 잔액은 765조4137억 원으로 1월 말보다 18조9105억 원 급증했다. 지난해 월평균 증가액인 2조9918억 원의 6배가 넘는 수준이다.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으니 시중자금이 MMF나 예금처럼 재투자 타이밍을 노리는 단기금융상품 뒤로 몸을 숨기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오정선 외환은행 압구정WM센터 팀장은 “지금은 주식도 싫고, 펀드도 싫다는 고객이 많다”며 “최근 부동산 거래마저 끊기면서 좀처럼 안 팔리는 부동산을 대신 정리해 달라는 부동산 처분 신탁 요청까지 늘고 있다”고 전했다.

돈은 많은데 투자할 곳이 없어지자 공모주 청약 시장을 중심으로 단기 차익을 노리는 ‘게릴라성 투기 자금’도 속출하고 있다. 지난주 사전 예약을 받은 신한은행의 기업인수목적회사(SPAC·스팩) 펀드 상품에는 3일간 200억 원이 몰려 조기에 마감됐다. 올해 들어 국내 주식형 펀드와 해외 주식형 펀드에서 1조2980억 원가량이 빠져나간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상언 신한은행 PB고객부 팀장은 “조기에 수익이 나지 않는 상품이라고 은행 측에서 오히려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고객들의 가입이 쇄도하고 있다”며 “1호 펀드만 내려던 계획을 바꿔 2, 3호까지 만들기로 했다”고 말했다.

 


전문가 “日 버블 키웠던 상황과 비슷”

이런 게릴라성 투기 자금은 지난주 대한생명 공모주 청약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청약에는 2007년 삼성카드(5조9560억 원) 이후 최대인 4조2200억 원이 몰렸다. 신혜정 우리투자증권 PB도곡센터장은 “아무리 단기투자자라도 공모주 청약 후 한 달은 주식을 갖고 있는데 대한생명의 경우 당일에 7% 정도 수익만 보고 빠져나온 사람이 대부분”이라며 “그만큼 시장 상황을 좋지 않게 보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시중자금 흐름이 왜곡되는 원인을 초저금리 기조에서 찾고 있다.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치인 2.0%에서 13개월 연속 동결하고 있다. 한은은 경기가 회복 조짐을 보였던 지난해 9월부터 독자적인 금리 인상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정부의 ‘시기상조론’에 막혀 동결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장보형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지금은 과도한 저금리인데도 자금이 실물경제로 흘러가지 않는 왜곡 현상이 심각한 상태”라며 “현 금리 수준은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을 감안할 때 비정상적이며 인상할 필요성이 분명히 있다”고 주장했다. 권영선 노무라증권 이코노미스트 역시 “한국은 현재 1980년대 말 일본이 내수 부양을 이유로 정책금리를 27개월 연속 2.5%로 동결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라며 “일본이 당시 자산가격 상승과 유동성 증가에도 불구하고 긴축을 늦추며 버블을 키웠던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윤종원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장은 “지난해 금융위기 상황에서 공급한 유동성은 올해 거의 다 거둬들였다”며 “이제 남은 게 금리가 있지만 이는 금통위가 결정할 사안으로 정부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시장의 관심사는 다음 달 1일 취임하는 김중수 차기 한은 총재 내정자가 어떤 카드를 쓸지로 옮아가고 있다. 현재로서는 김 내정자가 정부의 시기상조론에 동조할 가능성이 크지만 시중자금의 단기 부동화와 자금 흐름의 왜곡이 심화할 경우 금리 인상론이 힘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은 안팎에서는 불확실한 경기 전망을 감안해 당장 기준금리를 올리지 않더라도 싼 금리로 시중은행에 자금을 공급하는 총액대출한도를 단계적으로 감축하는 등 유동성 관리 대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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