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들도 고난의 삶러서 숨진 장남 일제 독살說남동생 中 충칭서 행방불명딸 6·25때 대구서 교수생활
준생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안 의사가 거사를 위해 집을 떠났기 때문에 아버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1930년대 후반 일본이 점령한 중국 상하이에서 그는 악기상을 열고 식당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어렵게 지냈다. 급기야 일제의 계략에 휘말려 1939년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뜻으로 지은 서울 남산 기슭의 박문사를 참배하고 이토의 아들을 만나 아버지의 ‘잘못’을 사죄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그는 1950년 6월 귀국했으나 1952년 11월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부인 정옥녀 여사는 자녀(1남 2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26일 열리는 순국 100주기 추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준생의 딸인 안연호 여사(73)가 귀국했다. 준생의 유해는 경기 포천군 천주교 공원묘지에 묻혀 있다.
안 의사 가족의 삶을 추적한 창원대 도진순 교수(사학과)에 따르면 장녀인 현생도 일제의 집요한 계략에 휘말려 1941년 3월 26일 안 의사의 기일에 박문사를 참배하고 아버지의 ‘죄’를 사죄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현생은 1946년 중국 상하이에서 귀국해 6·25전쟁 피란시절에 대구 효성여대 프랑스어과 교수로 생활하다 1959년 4월 세상을 떠났다. 두 딸인 황은주(82·국내 거주) 황은실 여사(79·미국 거주)가 100주기 추념식에 참석한다.
안 의사 아들의 후손은 미국, 딸의 후손은 남한, 동생 정근의 후손은 남한과 미국, 공근의 후손은 북한과 파나마에 흩어져 살고 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 동영상 =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삶과 죽음까지의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