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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이 쓰는 6·25의 결정적 전투]3000자에 담은 전쟁 발발 원인과 배경

입력 | 2010-04-01 03:00:00

공산주의 팽창정책-美 철군
한반도 힘의 공백 상태 불러
소련 신형무기 대거 北지원
김일성 “50일만에 점령” 남침




《이 땅에 6·25전쟁이 일어난 지 만 60년이 되었다. 20개국이 넘는 나라가 가담한 대규모 국제전이었으며 3년이 넘게 이어졌던 6·25전쟁은 단지 남북한 내전이 아니라 세계질서를 재편한 국제적 사건이었다. 복거일 씨는 전투 규모가 아니라 전투 내용에 천착해 향후 전황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다섯 개 전투를 꼽아 6·25를 소개할 예정이다.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잘 모르는 현대사의 장면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6·25전쟁 발발 당시 정세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하자, 미국과 소련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다. 이런 상황에서 1948년 남북한에 각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서자, 남북한 관계는 더욱 적대적으로 굳어졌다.

북한의 공산주의 정권은 처음부터 남한을 무력 점령하려 했다. 공산주의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는 끊임없이 외부로 팽창하려는 속성을 지닌다. 그런 팽창을 멈추면 전체주의 체제는 운동량을 잃고 쇠퇴한다. 그런 관점에서 살피면,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을 때 6·25전쟁은 거의 필연적으로 예상되었던 일인 셈이다.

여기에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끈 공산군이 장제스(蔣介石)의 국부군에 이겨 중국 대륙을 차지하자 북한의 남침 기도가 현실화됐다. 배후에 우호정권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이 동아시아의 공산주의 혁명을 이끌어야 한다고 믿고 베트남과 한반도의 공산주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또 유럽에서 팽창정책이 막히자 동아시아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던 스탈린은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야심을 부추겼다. 6·25전쟁은 이들 세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합작품이었다.

○ 북한에 비해 형편없었던 남한의 전력(戰力)

한국을 무력 점령하려는 계획이 세워지자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으며 서둘러 군사력을 키웠다. 당시 북한군을 도운 소련 군사 고문은 3000여 명이었는데 소련군 대좌가 북한군 보병 사단장의 고문이었다. 북한군은 소련군의 교리를 충실히 따랐다.

소련은 북한에 최신 무기도 제공했다. 신형 무기 중 가장 위력적인 것이 전차(戰車)였다. 미군 정보부대가 개전 3주일 만에야 정체를 파악한 이 전차는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표준형으로 채택한 T34 중형이었다. 85mm 포와 기관총 2정을 장착해 무게가 32t이나 되며 자세가 낮았고 두꺼운 장갑판들로 덮여 있었다.

개전 당시 북한군이 보유한 T34 전차는 150대가량이었다. 전차 120대와 6000명의 병력으로 이루어진 105전차 여단은 전쟁 초기 서울 점령에 크게 기여해서 보병 3사단 및 4사단과 함께 ‘서울사단’이라는 명예칭호를 얻었고 사단으로 승격했다. 소련은 또 각종 항공기 180대를 북한군에 제공하기도 했다. YAK 전투기 40대, YAK 훈련기 60대, 공격폭격기 70대, 그리고 정찰기 10대를 보유한 북한 공군은 변변한 항공기를 갖추지 못한 한국 공군을 압도했다.

한편 중국은 조선족 병사들을 북한에 보내 북한군의 증강을 도왔다. 1950년 6월 북한군이 한국을 침입했을 때, 중공군 출신 조선인 병사들은 북한군의 3분의 1가량이나 되었다. 이들은 국공내전에서 전투 경험까지 가져 북한군 전투력의 원천이라 할 만했다. 북한군 5사단, 6사단 및 7사단은 아예 중국에서 편성되어 뒤에 이름만 북한군 편제를 따랐을 정도였다.

이에 비해 한국군 전력은 매우 허약했다.

지상군 전력도 북한과 달리 전차를 갖추지 못했다. 공군도 12대의 연락기와 10대의 훈련기만을 지녔다. 치명적인 것은 북한의 최신형 전차를 막을 대전차무기를 지니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북한군 전차에 대한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훈련 상태도 미흡했다. 개전 당시 한국군 부대는 대부분 중대 단위 훈련을 마치고 대대 단위 훈련을 시작한 참이었다. 무기와 훈련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그 수만 보더라도 이미 큰 차이가 났다. 개전 당시 북한군은 육군 18만2680명, 해군 4700명, 공군 2000명이었지만 한국군은 육군 9만4974명, 해군 7715명, 공군 1897명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미국은 재정적 부담 등으로 감군(減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의 지정학적 전략적 가치를 높게 보지도 않았다. 1947년에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딘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보낸 ‘한국에 관한 비망록’에서 “군사적 안보의 관점에서 현재 한국에 주둔한 병력과 기지들을 유지해서 미국이 얻을 전략적 이익이 거의 없다고 본다”고 했다.

‘미국의 서태평양 방어선이 알류샨 열도, 일본, 류큐 열도,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선이며 대만과 한국은 방위선 밖에 있다’는 애치슨 국무장관의 1950년 1월 12일의 선언은 그런 견해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미국은 1949년 6월 한국에 주둔한 미군을 모두 철수해 6·25전쟁 발발 당시 한국에는 482명의 군사 고문밖에 없었다.

게다가 미국은 한국에서 치안에 필요한 최소한의 군대만을 갖추도록 했다. 당연히 야포나 전차와 같은 무기들을 제공하는 것도 꺼렸다.

▼ 국군 눈부신 선전-美빠른 참전, 北적화야욕 무산시켜 ▼

6·25전쟁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결판이 난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정권과 군부도 그렇게 믿었다. 북한군이 하루 진격 속도를 10km로 잡아도 50일 안에 부산을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광복 5주년이 되는 1950년 8월 15일에 군사작전을 종료함으로써 적화 통일의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속셈까지 가졌다.

김일성은 미국의 개입을 걱정하는 스탈린에게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기 전에 남한을 다 점령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혹시 미국이 개입할지 모르니, 만주 국경에 중공군 3개 군을 배치해 주겠다”는 마오쩌둥의 제안도 사양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북한 지도부가 미처 예상치 못한 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한국군의 눈부신 선전이었다. 병력도 부족하고 대전차무기도 없었지만 한국군은 적군의 진출을 최대한 더디게 해서 시간을 벌었다. 또 하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미국의 빠르고 과감한 참전이었다. 북한군이 한국을 침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참전을 결심했다. 이는 1949년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 무너지고 중국 대륙에 마오쩌둥의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자 미국 시민들이 큰 충격을 받은 데서 비롯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동맹국이었던 소련이 갑자기 위험한 적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중국 대륙이 공산당 정권에 넘어가자 미국 내에선 “누가 중국을 잃었나(Who Lost China)?”라며 정치권에 책임을 묻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의 민주당 정권은 수세에 몰렸다. 북한군이 한국을 기습적으로 공격했을 당시 정치 상황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국의 참전을 결정하도록 압박했던 것이다.

복거일 시사평론가·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