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총재로 내정된 직후 그의 일성(一聲)은 “한은의 독립이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하는 건 아니다”였다. 한은 내부가 소란해졌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발언이 적절했는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해묵은 한은 독립성 논쟁이 다른 사람도 아닌 차기 한은 총재의 입을 빌려 공론의 무대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 업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는 “(금리 인상은) 때가 되면 할 것”이라고 했다. 원론적인 언급인데도 자금시장에서는 채권금리가 급등했다. 결과적으로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금리를 올리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거뒀다.
언제부터인가 한은의 독립성은 어느 누구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禁忌)의 영역처럼 됐다. 중앙은행의 기능과 역할을 시대 변화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지만 독립성 얘기만 나오면 한은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쳤다.
따지고 보면 ‘중앙은행 독립’의 범위를 제한한 김 총재의 말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 어제 그에게 임명장을 준 이는 이명박 대통령이다. 경제정책이 결정되는 메커니즘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국민이 보기엔 중앙은행도 ‘넓은 의미의 정부’다. 하지만 금리 결정에 영향을 미치려는 역대 정권의 시도가 거품을 일으켜 경제시스템의 불안 또는 붕괴라는 최악의 결과를 낳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장은 성가시더라도 통화신용정책의 중립성을 명시한 한은법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친 뒤에는 성격이 다른 또 하나의 금기가 관변(官邊) 쪽에서 생겨났다. 금리 인상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면 경제를 회복시켜야 하는 절박감이 떨어지는 것처럼 몰아붙이는 기류가 형성된 것이다. ‘저금리만이 절대선(善)’이라는 신종 도그마다.
쟁점은 결국 금리로 귀착된다. 기준금리를 올리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금리를 인상한다면 언제가 좋은지 등은 따져봐야 할 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문제를 전담하는 금융통화위원회를 별도로 운영하는 것은 금리를 결정하기가 그만큼 힘들고, 경제 상황과 국민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한은 독립성과 금리는 4년 임기 내내 서로 맞물리면서 끊임없이 그에게 도전장을 내밀 것이다. 이곳저곳 기류를 살피느라 번번이 밀리면 누구보다도 경제주체들이 고단해진다. 중앙은행 총재가 중심을 잡으면 적어도 경제가 고꾸라지는 화(禍)는 막을 수 있다.
박원재 경제부장 parkw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