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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커버스토리] 거장 김수현의 귀환, 그리고 다시 가부장제?

입력 | 2010-04-01 15:00:00


● 가부장제는 끝났다. 그러나 가족주의는 영원하다?
● SBS 주말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속의 김수현 월드
● 극적으로 돌변한 아버지 역할, 그리고 동성애 코드까지…


드라마 작가의 살아있는 전설 김수현이 돌아왔습니다. SBS 주말극 '인생은 아름다워'. 또 다시 가족입니다. 수십 년간 그녀가 천착했던 한국에서의 가족 말입니다.

한국사회에서 가족이란 참 눈물나는 단어입니다.

과도한 부모의 기대와 그에 대한 자식들의 반항, 남들에게는 결코 털어놓을 수 없는 가슴 아픈 과거들, 서로에 대한 연민, 서로에 대한 증오, 서로에 대한 정신적 폭력 그리고 서로에 대한 사랑. 이 모든 것이 얽히고설켜 끊어 내려야 끊어낼 수 없는 수십 년간의 애증의 역사. 이 모든 것이 '가족'이라는 단어에 집약되어 있죠.

특히 한국에서는 가족이라는 단어가 더욱 묵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이면 독립하는 서구와 달리 30대는 돼서야 결혼과 동시에 겨우 독립된 가정을 꾸리니 말입니다. 10년 그것도 완전한 성인이 된 후 10년을 부모와 부대끼며 살아간다는 것은 음…, 서로에게 치명적 상처나 극복할 수 없는 부채감을 남기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김수현식 화법의 절정 '엄마가 뿔났다'


▶ 한국에서 누구나 공감할 강력한 테마 '가족'

게다가 한국의 가족은 엄청난 사회적 책무를 떠맡은 특수 조직입니다.

아이들 버릇이 나쁘면 학교 교육을 탓하기 전에 "뉘 집 자식이냐"는 이야기가 먼저 들리기 마련이지요. 대학생들은 소위 FM장학금(파더 앤 마더 장학금)을 받고 청년실업으로 백수 생활을 해도 국가의 실업수당이 아닌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타게 됩니다.

어디 용돈뿐입니까? 집을 사거나 사업상 급할 때 가족은 은행을 대신하기도 하지요. 나이가 들면 어떤가요? 요즘이야 많이 변했다지만 병간호는 의료기관이 아닌 아들집에서 받게 되고, 병원에 있더라도 아들 딸 며느리 손자가 돌아가며 불침번을 섭니다.

아… 가족이 없었으면 정말 이 한국사회를 어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취약한 사회적 복지를 누가 해결해주나요? 바로 '가족'입니다. '국가'는 나에게 해준 게 뭘까요? 글쎄요…, 많긴 많은데 특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가족은 그래서 한국 드라마에서는 빠질 수 없는 주제인가 봅니다. 누구나 공감하니까요, 누구나 잘 알고 있으니까요, 또 누구라도 문제없는 가족은 없으니까요. 이런 가족 드라마의 대본을 40년 동안 써온 작가가 있으니 그가 바로 한국 최고의 드라마 작가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김수현(69) 작가입니다.

그래서 김수현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가족을 소재로 한 드라마로 복귀했습니다. 가족간의 출생의 비밀과 배반, 복수로 점철된 막장 드라마들이 "악성 바이러스를 무분별하게 양성하고 있다"고 일갈하며 시작한 작품입니다.

▶ 막장드라마를 비판한 김수현의 신작 '인생은 아름다워'

 '김수현 월드'의 재림 SBS 주말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이제 방영이 시작된 지 겨우 2주가 지난 작품입니다만 '인생은 아름다워'에는 김수현식 가족과 김수현식 문제제기 그리고 의례 그 빛나는 김수현식 대사들로 이루어진 원단 김수현의 드라마입니다.

이 작품은 제주도가 배경입니다. 작가가 보여주겠다던 따뜻함을 상징하기에 꽤 좋은 장소죠. 팬션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요리연구가인 어머니. 이 둘은 각자의 아들과 딸을 데리고 결혼한 재혼가정입니다. 둘 사이에서 새로 태어난 아들과 딸이 있고 시부모, 두 명의 삼촌, 큰 딸과 결혼한 사위 등이 주요 가족 구성원입니다.

현실에서는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대가족이지요. 적어도 3대 이상, 그리고 삼촌 등의 군식구까지 모여 사는 대가족은 김수현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가족 구조입니다.

고집불통이지만 삶의 연륜으로 현명한 결정들을 이끌어내는 조부모. 효자이자 자상한 아버지. 순종적이지만 현명하며 때로는 강단 있는 어머니, 냉정한 판단과 강성 발언의 원칙주의자 둘째 삼촌 혹은 둘째 자녀, 본성은 착하지만 가끔씩 엉뚱한 사고를 치는 셋째 삼촌 혹은 셋째 자녀. 이 구조가 김수현 가족 드라마의 기본 골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대가족의 원형이라도 불러온 듯한 이 대가족과 가족 구성원들이 삶을 헤쳐 나가고, 가족간 갈등을 해결해가는 모습은 김수현 작가를 "여성이면서도 가부장제를 옹호한다"라는 비판에 종종 직면하게 했었습니다.

김수현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사랑이 뭐길래'에서 대발이 아버지는 가부장제 아버지의 전형이었죠. 고집스럽고, 어머니와 자식들은 그의 호통 앞에 벌벌 떨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버지는 겉모습과 다르게 속이 깊고 삶의 연륜으로 가족을 이끌어나가는 현명함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목욕탕집 남자들' '사랑과 야망'은 물론 지금 방영되고 있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도 조부모의 결정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결정들은 그 누구의 결정보다 현명하지요. 또 예전 작품들에서 지속적으로 보여주었던 아들과 딸의 역할 차이, 어머니들의 순종적 모습 등에서 김수현에 대한 가부장제 옹호란 혐의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김수현이 표현해왔던 가족의 변천사를 이해한다면 이 드라마는 더 흥미롭게 읽힌다.


▶ 극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김수현식 화법

2000년대 들어 김수현의 드라마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인생은 아름다워'에 등장하는 할아버지는 더 이상 가족을 이끄는 현명한 할아버지가 아닙니다. 가족을 버리고 바깥살림을 하다가 다 늙어서야 뻔뻔하게 돌아와 같이 살겠다고 방을 내어놓으라고 생떼를 씁니다. 할아버지의 말과 행태는 여전히 가부장제를 답습하고 있죠.

하지만 이 권력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할머니의 눈을 피해 몰래 숨어들어야 했고, 골방에서 외출이라도 한번 할라치면 할머니를 제외한 온 식구들이 한바탕 소동을 벌여야 합니다. 할아버지는 숨기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지 더 이상 두렵거나 따라야 할 대상은 아닙니다. 물론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역할과 위치를 대체하고 있지만 절대복종이 아닌 예우의 차원으로 변화했습니다.

아버지의 역할도 변했습니다.

권위적이라기보다 예전이라면 어머니가 맡았을 집안의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엄마는 뿔났다'에서 아버지는 뿔난 엄마와 뿔난 자식들을 이쪽저쪽 다독이는 새로운 형태의 아버지였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도 그리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할아버지의 돌연한 등장에 기함하는 할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말할 기회를 보고, 할아버지의 기분을 맞추고, 원칙주의자 둘째 동생의 비판을 감내하고, 막내 동생과 자식들에게 협조를 부탁합니다. 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드러운 중재자로 나선 아버지는 김수현이 생각하는 2000년대 아버지의 역할이 아닐까요?

또 하나의 에피소드로 등장한 남자들에게 앉아서 소변보기를 제안하는 큰 딸의 모습을 보며 더 이상 김수현에게 가부장제의 옹호자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김수현의 작품이 그려내는 가족의 모습은 변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가족 자체에 대한 천착입니다. 김수현에게 가족은 드라마의 소재가 아닌 주제로 보입니다. 대가족이라는 구조와 공간을 만들어놓고 그 속에 가부장이 되었든, 새로운 부모상이 되었든 자식들의 행동이 되었든 모든 에피소드들을 몰아넣습니다.

그리고는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인생의 아름다워'를 언론에 공개하며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동성애자 큰 아들 역시 가족을 위한 하나의 장식으로 보입니다. 가족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하나의 첨예한 갈등 상황 중 하나 일 뿐입니다.

김수현에게 '인생의 아름다워'의 동성애나 '엄마가 뿔났다'의 가출이나 '사랑과 야망'의 신경증은 모두 가족에게 닥친 시련이며, 가족이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개인'이 아닌 '가족'으로서의 문제와 그 해결. 바로 이 지점에서 김수현 작가에게 '가족주의'라는 혐의를 제기해보고자 합니다.

대기업이 이미지 광고에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문구를 쓸 정도로 한국사회에서 가족은 강력한 의미를 지닙니다. 서두에 이야기 했듯 가족은 열악한 사회적 안전망을 대신해주는 생존 공동체이며, 역사가 쌓인 감정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개인'과 '개인의 집합으로서 가족'은 매우 다른 문제겠지요.

한국 가족드라마 형식을 완성한 작가 김수현(연합뉴스)


▶ 가부장제에서 독립했지만 여전히 강고한 가족주의

땅으로부터 독립한, 씨족으로부터 독립한 개인. 그래서 "어느 마을 누구" 혹은 "어느 집안의 몇째"가 아닌 온전히 자신의 이름으로 타인에게 호명되는 근대적 '주체'의 탄생. 그 개인의 집합체로서의 집단과 사회. 그것이 근대사회의 출발점이고 근간이었습니다.

가족 역시 개인의 공동체입니다. 물론 그 공동체가 혈연이라는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특수한 조건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해도 말이죠.

근대적 개인과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특수조건 속에 가족의 비극이 싹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수현 드라마에 종종 등장하는 냉정하며 이성적인 둘째들의 모습은 아마도 이런 현실을 반영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뻔뻔하게 밀고 들어온 할아버지를 둘째 삼촌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용서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장인 아버지는 그래도 자신의 아버지 혹은 늙고 지쳐버려 오갈 데 없어진 늙은이라고 받아들이려 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 수 없으나 기존 김수현의 드라마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감싸 안아왔습니다.

또 개인의 문제에 대한 가족적 해결은 실로 환상이기도 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일 수 밖에 없는 동성애에 대해 가족이 어떤 결론을 내어 놓을 지도 매우 궁금합니다. 개인의 취향에 대해 가족들은 어설픈 이해와 가족이라는 이름의 알 수 없는 지지 정도밖에 할 수 없지 않을까요? 그 어설픈 이해와 지지가 개인에게 무슨 의미일까요?

게다가 가족의 비극이 가족 그 자체에서 발생하며 심지어 가족이라는 이름이 개인을 망가트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김수현 드라마의 가족은 위기가 있을 뿐 파괴된 가족도 파괴된 개인도 없습니다. 어찌 보면 막장드라마도 결론은 해피 엔딩 아니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시청자들의 눈높이를 고려한 결과일 수도 있겠죠.

2000년대 김수현의 또 다른 대표작 '내 남자의 여자'는 이런 의미에서 매우 특이한 작품이었습니다. 결혼에 대한 개인적인 접근. 해체되어 마땅한 가족의 해체. 지극히 이기적인 개인들이 쏟아내던 김수현 특유의 짧고 핵심적인 대사.

70이 넘어버린 노작가에게 다시 한번 '내 남자의 여자'에서 보여줬던 변신을 기대한다면 무리일까요?

조희제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