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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칼럼/권재현의 트랜스크리틱]레이첼 와이즈 vs 배종옥

입력 | 2010-04-01 17:00:00


3월21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로렌스 올리비에 연극상 여우주연상의 영예가 레이첼 와이즈에게 돌아갔습니다. '미라'와 '콘스탄틴' 같은 할리우드 액션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영웅의 도움을 기다리는 어여쁜 공주님 역할을 맡던 여배우가 영국의 토니상이라 할 수 있는 올리비에 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좀 놀랐습니다. 와이즈는 연기보다는 미모로 기억되던 여배우였기 때문입니다. 영국에서 가장 결혼하고 싶은 여자 1순위로 그녀가 뽑혔다는 얼마 전 뉴스도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 놀라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수상의 영광을 안긴 연극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임을 발견하고 또 놀랐습니다. 그저 예쁜 줄만 알았던 여배우가 1951년 동명의 영화에서 비비안 리가 불멸의 연기를 펼친 블랑시 뒤보아 역으로 콧대 높은 영국 평단을 평정했단 말인가 하는 경악. 그래서 지난해 여름 250석 규모의 소극장에서 막을 올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대한 공연리뷰기사를 찾아봤습니다.

온통 레이첼 와이즈에 찬사였습니다. 블랑시 역을 하기엔 너무 예쁘고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는데 팔색조처럼 변신하면서 무대와 객석을 압도했다는 평이었습니다. 너무 늙었다고? 다시 그녀에 대한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맙소사! 1970년 3월 7일생. 신문사 나이로 올해 마흔, 마흔! 저와 동갑이었는데 허걱, 생년월일까지 똑같더군요. 게다가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유태인 출신의 재원에 8년 전 할리우드로 진출하기 전까지 연극무대를 꾸준히 지켜온 배우였습니다.

극찬에 가까운 평 중에는 심지어 블랑시 역에 도전했던 은막스타들-제시카 탠디, 비비안 리, 글렌 클로즈, 제시카 랭 중에 최소한 뒤의 두 명을 능가하는 카리스마 연기를 보여줬다는 평까지 있었습니다.

'레이첼 와이즈에 대한 재발견'이 있기 이틀 전에 한국에서도 스타급 연기자가 출연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무대에 올랐습니다. 3월19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였습니다. 블랑시 역에 배종옥, 스탠리 역에 이석준, 블랑시의 여동생이자 스탠리의 아내인 스텔라 역에 이지하.

뮤지컬 '헤드윅'과 연극 '39계단'으로 다양한 연기변신을 펼쳐온 이석준과 2008년 '오레스테스'로 동아연극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억울한 여자'로 연극계 스타로 떠오른 이지하의 무게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도 관심은 연극배우 이승비씨와 함께 블랑시 역을 맡은 배종옥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가 누구입니까. 배종옥은 '1980년대의 고소영'이었습니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도도한 말투로 똑 부러지는 도시녀를 상징하는 스타였습니다.

1990년대 뜻밖의 결혼과 이혼의 통과의례를 겪으면서 원숙해진 그녀는 '거짓말'(1998년)과 '바보 같은 사랑'(2000년) 등 노희경 작가의 TV드라마를 통해 추레한 삶의 찌꺼기를 내보이는 연기를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영화 '오감도'나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등을 통해 그 권태로운 삶에 피어난 곰팡이 같은 관능미까지 뿜어내고 있습니다.

배우로서 배종옥의 연기행로는 블랑시의 인생역정과 겹쳐집니다. 블랑시에겐 두 개의 이미지가 공존합니다. 하나는 미국 남부에서 '아름다운 꿈'(Belle Reve)이란 대저택에 살던 '하얀 숲'(블랑시 뒤부아란 이름의 본뜻)이란 이름을 지닌 범접하기 어려운 공주님입니다. 다른 하나는 환상으로 시작해 환멸로 끝난 결혼이 남편의 자살로 종지부를 찍은 뒤 전락을 거듭하며 욕망의 바닥에서 허우적대는 '암거미'(그녀가 묵던 호텔의 이름 타란툴라는 대형거미의 이름)입니다.


전자가 도도한 배종옥에 부합한다면 후자는 한편으론 피로와 권태에 물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관능적 여인으로 꽃피고 있는 배종옥과 맞아떨어집니다. '배종옥의 블랑시'에 대한 기대치가 한껏 올라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기대가 컸기에 아쉬움도 컸습니다. 배종옥의 블랑시는 한마디로 너무 예쁘고 너무 환합니다. 극중 블랑시는 종이갓을 씌운 어두운 조명을 통해 자신의 나이와 어두운 현실을 감추려합니다. 눈부시도록 화려한 드레스 또한 화려했던 과거만 부각하고 비루하고 추레한 현실을 덮으려는 장치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좌절된 사랑에 대한 환멸과 그를 해소하기 위한 왜곡된 욕망의 녹청이 덕지덕지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사이키델릭 조명처럼 환상의 빛과 환멸의 어둠이 동시에 명멸하는 분열적 인물상을 그려내야 합니다. 그러나 배종옥의 블랑시가 자체 발광하는 빛이 백열전등처럼 강렬하다보니 그 어둠이 잡아 먹혀버리는 부조화가 빚어집니다.

이는 우선 캐릭터 해석의 문제에서 비롯한 측면이 있습니다. 연출가 문삼화는 블랑시를 '바보 같은 여자'로 단순화시킨 측면이 있습니다. 고고한 척 똑똑한 척 다하지만 결국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헛똑똑이라는 시각입니다. 이게 똑 부러진 배종옥의 본래 이미지와 공명하면서 환멸보다는 환상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연기앙상블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점도 있습니다. 블랑시는 스스로 빛을 내기보다는 주변인물과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인물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여동생 스텔라(별이란 뜻)를 접하면 그 내면의 추억과 환상의 비누방울을 뿜어내다가도 어둡고 동물적인 스탠리와 충돌하면 가라앉아있던 흙탕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스텔라와 스탠리가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낼 때 블랑시의 이중성이 더욱 극명히 드러나는 법인데 이지하와 이석준이 배종옥의 빛에 너무 가려졌습니다.

특히 이석준이 연기한 스탠리가 진짜 짐승남의 포스를 풍기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스탠리는 말 그대로 블랑시와 으르렁거리며 싸워야합니다. 단순히 독한 대사를 치고받는 것을 넘어 눈빛과 숨소리부터 기(氣) 싸움을 펼쳐야합니다. 1951년 흑백영화에서 마론 브란도와 비비안 리가 그랬던 것처럼 첫 만남부터 야수와 야수의 눈싸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석준과 배종옥 사이에선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을 찾기 어렵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정작 스파크가 일지 않는 셈입니다. 스탠리가 술친구들과 펼치는 카드게임의 진행상황은 스탠리와 블랑시 사이의 역학구도와 밀접한 연관관계를 갖는데 이게 섬세하게 포착되지 못한 점도 못내 아쉽습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책임은 배종옥 자신에게 있습니다. 클로즈업된 영상 속에서 섬세하게 표현되는 심리묘사가 연극무대에선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했습니다. 스텔라의 집에 처음 들어서 혼자 남자마자 몰래 위스키를 따라 마실 때 손과 입술의 떨림 같은 미묘한 연기가 감지되지 못했습니다.


비음이 섞인 발성 역시 감정의 진폭에 따라 고저장단의 변화를 보여주는데 한계를 보였습니다. 연극무대에 자주 서지 않은 배우에게 450석 규모의 중극장 무대는 아무래도 벅차 보였습니다. "당신이 누구든, 난 언제나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해왔어요"같은 감성적 대사에 비해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실이어야 하는 것만 말해요"같은 이지적 대사의 전달력이 떨어진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듯했습니다.

배종옥처럼 영상연기가 뛰어난 배우가 '여배우들의 로망'이란 블랑시 역을 맡고도 무대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연극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극적 사례입니다. 연극배우는 단순히 연기력만 요구되지 않습니다. 카메라가 포착한 좁은 공간이 아니라 무대라는 더 큰 공간을 장악해야 하고 바로 코앞에서 자신의 연기를 지켜보는 관객을 두 시간 넘게 휘어잡는 매력을 발산해야합니다.

어쩌다 한번 연극을 보신 분들은 영화나 드라마에 비해 배우들의 연기가 눈에 차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십니다. 확실히 연극판에서 연기를 잘한다는 배우들이 영화판으로 옮겨가다 보니 정작 연극배우 중에 뛰어난 배우가 적어진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영화나 TV연기에 비해 연극무대에서 연기를 잘한다는 것이 갑절은 더 어렵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5월23일까지 계속 달립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배우들 연기에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면 언젠가 그 전차가 불꽃을 튕기며 달릴 수도 있습니다. 매일매일의 연기가 다른 게 연극의 묘미이기도 하니까요.

배종옥의 연기 역시 단순한 블랑시를 벗어나 보다 복잡한 블랑시로 충분히 진화할 수 있습니다. 그를 위해서 명심해야할 것은 레이첼 와이즈가 블랑시 역을 맡을 때 봉착했던 우려, "너무 예쁘고 너무 나이가 많다"를 똑같이 극복해야한다는 점입니다. 너무 예쁘게 보이지 말 것, 그렇지만 나이와 함께 새겨진 인생의 주름살을 배역에 새겨줄 것. 다행히도 그녀는 와이즈보다는 덜 예쁜 반면 나이는 여섯 살이나 더 많습니다.^^

연극이 시작될 무렵 블랑시의 그 유명한 대사를 재음미해보는 것도 방법이란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그랬어요. 먼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다음엔 또 이름이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탄 다음에 여섯 정거장 더 가서 '낙원'에서 내리라구요."

욕망은 묘지(죽음)을 거칠 때 비로소 낙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무대 위에서 아름답게 빛나고자 하는 모든 여배우의 욕망 역시 죽음 같은 환멸과 깊은 입맞춤을 마치고 다시 비틀비틀 몇 걸음 더 걸어갔을 때 열반의 경지를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