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6·25전쟁 직후라 유엔 깃발과 태극기 사이에 악수하는 두 손 밑에 ‘이 책은 유엔아동기금으로’ 운운하던 교과서, 마분지 구멍 뚫린 활자와 그림을 펼쳐볼 때면 날아갈 듯 신기하게 여기기도 했었다. 방과 후 읍내에 들러 호롱불 밝힐 석유를 받아올 물건은 집에서 가져가 수업시간 내내 발밑에 놓아두었던 팥 한 됫박이었는데, 석유를 됫병에 받아 고개 둘의 겨울 눈 산길을 넘어야 하는 고역은 어린 소년에게는 과중한 책무였다.
급속한 변화는 산골에도 들이닥쳤다. 선생님의 혹독한 검사를 통과하기 위해 장지에 소금을 묻혀 양치질을 하던 어느 날 치분이라는 것이 나오더니 곧이어 등겨로 만든 거먹비누가 등장했고 장날이면 짚으로 묶어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했던 양잿물 고체 덩어리는 도리어 무서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렇게 원시상태를 넘어 4·19와 5·16을 거쳐 새마을운동 노래를 행진곡으로 삼던 시대를 떠나 난생처음 중앙선 종착역 서울에 내렸을 때 네온 불빛의 찬란한 천연색에 눈을 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역시 이발소에서는 머리카락을 자른 뒤 난로 물을 갈아 붓고는 4등분한 빨랫비누로 벅벅 감아주던 풍경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고향으로의 급한 소식을 글자수로 계산하는 전보가 문명 혜택이었다.
그러더니 백색이니 청색이니 하는 전화가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고 전차를 밀어내고 1호선 지하철이 들어서자 꿈인가 여겼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상상하는 것은 다 있다. 아니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 더 많다. 그러니 이쯤 되면 500년이 아니라 1000년은 압축해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해마다 팀을 이루어 가던 중국 오지 소수민족 학술답사 여행이 금년 겨울 얼추 마무리 단계에 들었다. 금년 벽두에는 먀오족 야오족 둥족 부이족을 돌아봤다. 고원지대에는 소수민족이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는 편벽한 상태로 자신들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차! 좁고 컴컴한 가옥 안에 함께 돼지를 키우면서도 집안 1층 모계사회 흔적을 간직한 할머니 방 천연색 TV에서는 한국 연속극 ‘대조영’을 방영했다.
곧이어 우리 안내를 맡은 마을 추장은 연방 휴대전화로 어디엔가 연락을 취했고 우리를 위해 보슬비 속에 민속춤을 보여주러 모여든 은모자에 알록달록 특유의 복장, 귀고리까지 갖춘 소수민족 소녀의 발엔 세계적 스포츠 상표의 운동화가 신겨 있었다. 밭벼 한 줄도 심기 어려운 다랑논으로 유명한 룽성 먀오족 높은 산꼭대기엔 접시 안테나가 집집마다 지붕을 덮고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렸고 화승총을 쏘며 우리를 맞이한 바사 먀오족 마을엔 한국 전자제품 간판이 당연한 듯 마을 입구를 장식했다. 문화충격이 아니라 문명충격이었다. 내 생애 500년 압축이 여기에서는 현재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문명의 초박형 압축이었다.
속도의 충격 견디기 또 하나의 숙제
휴대전화만 해도 사진이다, 동영상이다, 무선 인터넷이다 하지만 국경을 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자동 로밍이 되어 있음을 알고는 두려웠다. 그저 받고 걸고 하는 기능, 그리고 지금 겨우 익힌 문자 주고받기 이상은 내게 부담이다. 자! 이제 이 500년 문명 압축 충격에서 어떻게 벗어날까 하는 것이 내 인생의 과제이다. 딸마저 시집을 보내고 나니 민원이고 정보고 원하는 것은 인터넷으로 처리하라는 이 시대의 요구에 두려움이 앞선다. 문명의 발전이 두려움의 지수와 비례하는 낙오자의 세대, 나만 이렇게 느낄까? 그렇다면 나는 이제 모든 것을 제쳐두고 우선 압축에 대한 강박관념 풀기부터 새로운 각오로 서둘러야겠다.
임동석 건국대 교수·중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