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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다시 읽는 이상]돈,자본주의의 욕망을 만나다

입력 | 2010-04-07 03:00:00

‘식민지 백수’에겐 꿈도 이념도 사치




다방 ‘제비’ ‘학’ 등의 경영에 실패하자 이상은 구본웅의 제의로 1936년 창문사에서 근무한다. 하지만 구인회 동인지의 창간호이자 폐간호가 된 ‘시와 소설’ 첫 호를 펴낸 뒤 이곳에서도 퇴사한다. 왼쪽부터 창문사 시절의 이상과 박태원, 김소운. 사진 제공 소명출판

《시나 소설 따위를 모국어로, 혹은 일본어로 끼적이는 식민지 지식인에게 시장과 교환이 본질적 요소인 자본주의 체제하의 삶이란 소외와 적빈(赤貧)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이상은 식민지 최고 엘리트로서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에 근무하기도 했지만 건강상의 이유, 혹은 상관과의 불화로 오래 다니지는 못했다. 창조적 천재를 꿈꾸는 그에게 식민지의 테크노크라트라는 것이 영 마땅치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반일감정이나 기타 체제비판적인 에피소드를 이상이 남긴 것은 없다.》
“젖 떨어져서 나갔다가 23년 만에 돌아와 보았더니 여전히 가난하게들 사십디다. 어머니는 내 대님과 허리띠를 접어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내 모자와 양복저고리를 걸기 위한 못을 박으셨습니다. 동생도 다 자랐고 막내 누이도 새악시꼴이 단단히 백였습니다. 그렇건만 나는 돈을 벌 줄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버나요. 못 법니다. 못 법니다.”(수필 ‘슬픈 이야기’)

폐결핵 진단을 받고 1933년 총독부를 사임할 때까지 4년여를 제외하고 그는 평생 고정적 수입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총독부 기사직에서 물러난 뒤 백부의 유산을 정리하여 서울 종로1가 조선광업소 1층을 세내 ‘제비’를 개업했다. 금홍을 제비 다방의 마담으로 불러와 3년간 동거하였다. 그러나 ‘제비’ 다방을 개업했다고 해도 경제적 번창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동생인 김옥희 여사는 당시 풍경을 아래와 같이 술회하였다.

총독부 생활 4년만에 접고
다방 등 벌인 사업마다 실패


“아마 큰오빠는 경제력 때문에 고공(경성고등공업학교)에 진학했을 거예요. 총독부 시절에도 월급을 받으면 큰댁에 다 갖다 드렸어요.… ‘제비’를 할 때 가끔 생활비도 타고 빨랫감을 가지러 ‘제비’ 뒷문으로 해서 주방으로 가면 문인들만 몇 명 다실에 있었던 것 같고 손님이라곤 그저 그랬던 것 같아요….”

간혹 집에 생활비도 보내고 큰아들 노릇을 하던 해경은 “어떻게 해야 돈을 버나요. 못 법니다. 못 법니다”란 말대로 ‘제비’ 경영에 실패해 명도소송을 당한 끝에 1935년 폐업했다. 그 후 서울 인사동에 있는 카페 ‘학’을 인수하여 경영하기도 하고 종로1가에 다방 ‘69’를 설계하여 개업했으나 이것도 곧 실패하고 다시 명동에 다방 ‘맥(麥)’을 경영하려고 하다가 개업하기도 전에 남에게 양도당하고 말았다. 하는 일마다 실패를 한 해경은 홀연히 서울을 떠난다. 친구들은 종로, 혼마치(本町) 등을 모조리 뒤졌으나 그를 찾을 수가 없어 혹시 자살한 게 아닌가 무척 걱정들을 했다고 한다.

그는 1930년대 식민지 자본주의의 지옥을 체험했고 곧 그 바닥을 알았다. 그는 자본주의의 쓰레기장에서 지식인 백수로서 패륜을 걸머지고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봉착하게 된다. ‘날개’ ‘지주회시(蜘蛛會豕)’는 1930년대 식민지 자본주의의 지옥과 바닥을 아이러니스트의 냉혹한 시각으로 투시해낸 최고의 소설 작품이다. 지주회시는 문자 그대로 ‘거미가 돼지를 만나다’라는 것이다. 지주회시는 ‘날개’보다 더 리얼하게 식민지 자본주의의 추악한 모습과 그보다 더 추악한 지식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소설 속의 ‘그’는 카페 여급인 아내를 뜯어먹고 살고, 아내는 손님들의 돈을 뜯어먹고 산다. 아내는 A취인점(거래소)의 전무인 뚱뚱보가 자꾸 자기를 말라깽이라고 부르자 “양돼지”라고 내뱉고 만다. 화가 난 전무는 아내를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게 만들고 카페 직원들은 전무를 경찰에 신고한다. 전무는 A취인점 주임이자 ‘그’의 친구인 오 군을 통하여 위자료 이십 원을 준다. 오 군은 언젠가 ‘그’에게 “백 원을 가져오너라. 그러면 우선 석 달 만에 백 원 내놓고 오백 원을 주마”라며 돈을 받아가 놓고 그 후 일절 답이 없는 친구다. 오 군은 아내를 버리고 서울로 온 뒤 뚱뚱하고 생명이 이글거리는 마유미의 기둥서방으로 살고 있다. 남의 돈을 떼어먹으며 취인점을 경영하고 돈을 불리면서 너무도 생동생동 살고 있다. 그날 밤 아내가 받은 위자료 중 십 원을 쥐게 된 ‘그’는 그 돈으로 마유미를 만나러 달려간다.

극심한 생활고 겪으며
날 로 피폐해지는 영혼 그려


“손가락을코밑에가져다가가만히맡아보았다.거미내음새는-그러나십원을요모저모주무르던그새큼한지폐내음새가참그윽할뿐이었다. 요새큼한내음새-요것때문에세상은가만히있지못하고생사람을더러잡는다-더러가뭐냐.얼마나많이축을내나.가다듬을수없이어지러운심정이었다.거미-그렇지-거미는나밖에없다.보아라.지금이거미의끈적끈적한촉수가어디로몰려가고있나-쭉소름이끼치고식은땀이내솟기시작한다.”(‘지주회시’)

김승희

돈은 어디에 있나? 돈은 친구의 돈을 떼먹고 과거를 배반하고 아리송한 취인점을 통해 돈을 불려나가는 오 군 같은 사람이나 뚱뚱한 전무나 그들의 네트워킹 속에서 돌고 돈다. 화려한 자본주의의 네트워킹 가장 밑바닥에서 몸뚱이 하나를 자본으로 삼고 있는 아내나 마유미들은 거미다. 하지만 그런 거미들을 뜯어먹고 사는 ‘그’ 같은 지식인 룸펜이 더 절망적 거미라는 것을 그는 알게 된다. 이 무서운 세계에서 서로 녹여 먹고 녹여 죽이는 거미들의 체제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거미와 돼지가 만나서 서로 죽고 죽이는 이 식인성의 카니발. 어설픈 위로는 필요 없다. 다만 적나라한 절망이 더 절실할 따름이다.

김승희 시인·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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