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네콩티 제조사 佛DRC 와이너리를 가다
○ 섬세한 와인 맛은 자연의 몫
3월은 마지막으로 가지를 치고 거름을 주는 시기. 부르고뉴에선 “이른 가지치기든 늦은 가지치기든 3월의 가지치기만 한 것이 없다”는 격언이 있다. DRC 포도밭의 포도나무들은 그루터기가 아주 낮게 잘린 상태였다. 나무 가지 하나는 철사 줄을 따라 수평으로 고정해 지면에서 약 40cm 높이에서 휘어지게 만들었다. 이 동네에서 가장 흔한 귀요식 가지치기(19세기 중반 이 형태를 보급한 쥘 귀요 박사의 이름을 딴 방법)다. 거름은 외부에서 들여오지 않고 포도나무 가지를 잘게 부숴 뿌린다고 했다. 그래야 살아 있는 토양이 된다고.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 흙에는 이름 모를 식물들이 함께 자라고 있었다.
비탈진 위쪽에 있는 라 타슈 포도밭을 가장 먼저 둘러본 후 아래쪽 로마네콩티 포도밭으로 이동했다. 2년 전 만났던 보르도 샤토 라피트 로칠드의 크리스토퍼 살랑 사장이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은근히 무시했던 게 문득 생각났다. 별과 달의 주기에 맞춰 포도를 재배하고 수확하는 이 농법에 대해 당시 살랑 사장은 “흥미롭긴 하지만 한계가 있다. 포도나무에 서식하는 벌레를 잡지 않아 귀한 포도나무를 망치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빌렌 사장은 달랐다.
“만약 내게 15년 전 물었다면 나 역시 살랑 사장과 같은 답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땐 잘 몰랐거든요. 와인의 섬세한 맛은 결국 자연의 몫이라는 걸. 그래서 요즘엔 별과 달의 운행을 유심히 살펴 미생물이 활성화되는 시기엔 절대로 와인을 병에 담지 않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잘 익었으면 포도알과 가지를 함께 넣어 와인을 만들죠.”
‘부르고뉴의 신’으로 불렸던 고 앙리 자이에 씨의 조카인 에마뉘엘 루제 씨, 태어난 지 15분 뒤 와인에 입술을 댔다는 일화가 있는 랄루 비즈 르루아 여사 등 다른 부르고뉴의 유명 양조가들도 이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에 푹 빠져 있다. 물 흐르듯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이 친환경 경작법은 어쩌면 부르고뉴의 평화로운 마을 풍경과도 닮았다. 몇 년 전 세상을 뜬 앙리 자이에 씨의 소박한 집은 그가 떠났어도 여전히 그의 이름을 새긴 조그만 문패를 달고 있었다. 앞마당에 심어진 포도나무들도 예전 그대로다. 늙은 포도나무에서 기쁨의 ‘눈물’인 새 수액이 올라오듯 생명에 대한 관조가 흐르는 곳. 그래서 이곳에서 태어난 부르고뉴 와인은 다소 고집스러울 수는 있어도 우아한 기품을 품고 있는 것이다.
DRC의 6개 와인 중 특히나 마음이 가는 와인이 있냐고 묻자 골똘히 생각하더니 “다들 내 자식이다. 그런데 로마네 생 비방은 유별나게 기르기 힘든 자식이었다”고 했다. 1960년대 이 밭을 사 들여 좋은 토양으로 바꾸기 위해 부단한 관심과 정성을 쏟았다는 것이다. 그때 그의 표정은 정말로 자식을 염려하는 아버지의 표정 그대로였다.
그가 시음할 와인을 가져왔다. “당신처럼 매우 여성적인 와인이에요”라며. 아, 라 타슈 2006년 빈티지! 빌렌 사장의 말처럼 시간이 이곳에서 멈췄으면 했다. DRC는 연간 6000병 밖에 생산하지 않는 로마네콩티 한 병에 라 타슈 3병, 리쉬부르·로마네생비방·그랑에세조·에세조 각 2병씩 모두 12병을 한 세트(약 3000만 원)로 판다. 물량이 달려 나라별 공급량도 할당해 국내에선 유명 대기업 회장들도 손에 얻기 힘들다. 그 와인을 DRC 지하 셀러에서 맛보게 되다니….
라 타슈에 대해 기존에 갖고 있던 이미지는 루비 목걸이를 한 여성이었다. 매혹적인 장밋빛의 이 와인은 영화 ‘도쿄타워’에서 세련된 유부녀 여주인공이 친구 아들과 마주 앉아 마신 술이기도 하다. 고급스러우면서도 복잡한 감정 선을 지닌 와인이랄까.
절친한 와인 칼럼니스트는 DRC의 셀러에서 로마네콩티를 맛보지 못하고 온 내게 “오크통에 담겨 있던 한 방울이라도 마셔봤어야 했다”고 핀잔을 줬다. 그러나 주인이 내놓지 않는 와인을 청하는 건 왠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 같았다. 와인은 결국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며 하늘이 맺어주는 인연 아닐까. 20년 후 어엿한 아가씨가 돼 있을 딸과 함께 라 타슈 2006년 빈티지를 구해 마시려 한다. “옛날에 엄마가 DRC 셀러에서 말이지…”라며 한참 동안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때쯤이면 라 타슈도 치기 어린 화가 풀려 있겠지.
본 로마네=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