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의 부모와 피살자의 부모가 노래방서 만났다그들은 과연 무슨 노래를…연기 ★★★★ 연출 ★★★☆ 무대 ★★★
사랑하는 혈육의 죽음을 화두로
가족의 고통 사형제 등 도마에 올려…
배우들 복잡한 심리연기 탁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복수극이 난무하는 현실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하는 연극 ‘기묘여행’에서 어린 딸이 살해된 뒤 고통 받는 부모로 열연한 남명렬 예수정 씨. 남 씨가 딸의 복수를 위해 불타는 살의를 감추고 살인범의 가족과 여행에 동참하는 아비의 창 백한 고뇌를 표현했다면 예 씨는 ‘눈앞의 풍경’보다는 ‘머릿속 풍경’에 더 충실한 어미 의 적나라한 고통을 표현했다. 사진 제공 극단 산수유
‘기묘여행’(고조 도시노부 작, 류주현 번역·연출)의 주인공 미치나가(남명렬)도 짐을 싸면서 여행갈 때는 일상을 놓고 가라고 충고한다. 베개를 싸가려는 그에게 불현듯 여중생쯤 돼 보이는 그의 딸 가오루(김원진)가 나타나 잔소리를 한다. “베개야말로 일상의 대표선수”라고. 미치나가는 가방에서 딸의 자명종을 꺼내며 “이건 어떻고”라고 답한다. 그 순간 가오루가 스치듯 묻는다. “아빠가 잠을 못 자는 것과 내가 잠에서 못 깨는 것 중 어떤 게 더 힘들어?”
미치나가는 제안을 수락한다. 그러나 용서와 화해의 드라마를 떠올린다면 오산이다. 딸이 대신 쌌다는 그의 여행가방 속 내용물이 이를 말해준다. 청테이프, 밧줄, 염산 그리고 전기톱….
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복수는 나의 것’을 되뇌는 사내는 그렇게 본심을 감추고 그 기묘한 여행에 동참한다. 아츠시의 엄마(김정영)와 새아빠(오일영)는 이번 여행을 통해 1심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항소를 포기한 아츠시의 마음을 바꿀 생각뿐이다. 가오루의 엄마는 남편의 속내를 모른 채 동참한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머릿속에 있는 풍경 중 어떤 게 진짜일까”라는 남편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풀기 위해.
연극엔 살인의 동기나 과정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피해자 가족의 ‘머릿속 풍경’으로 전해질 뿐이다. 그렇다면 눈앞의 풍경은 무엇인가. 죄책감에 땀 흘리는 젊은이이고, 어떻게든 그 생명을 구하려고 필사적인 그의 가족이다.
죽이려는 자와 살리려는 자의 동행.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이 여행은 관객의 예상과 계속 어긋난다. 두 가족의 첫 만남의 장소부터가 ‘노래방’이다. 만남을 주선한 코디네이터(장용철)는 그들보다 더 영혼이 메마른 사람이다. 교도관 출신인 그는 과거 사형집행의 죄의식을 씻어내려 만남을 주선한 것이다. 미치나가의 복수는 첫날 면회 취소로 허무하게 무산된다. 이튿날 정작 미치나가는 꼼짝도 못하는데 “내 딸을 돌려 달라”고 절규하는 가오루 엄마가 난동을 피워 면회는 중단된다.
‘잠들지 못하는 아빠’와 ‘일어나지 못하는 나’ 중 어떤 쪽이 더 불행하냐는 죽은 딸의 질문 앞에서 이성적일 수 있는 부모가 있을까. 하지만 “죽으면 속죄도 못하잖아요, 살아서 속죄하게 해 주세요”라는 가해자 부모의 진심어린 호소도 외면하기 힘들다. 게다가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한 번으로”라며 사형 집행의 악몽에 시달리는 제3의 피해자까지 있다면 고민은 더 복잡해진다.
강렬한 살의에 불타면서도 그 실행에 한없이 무력한 아빠의 복잡한 심리를 연기한 남명렬 씨, 감정의 퓨즈가 모두 끊긴 듯 무표정한 얼굴 너머에 고인 슬픔을 파리한 몸짓으로 길러내는 예수정 씨의 연기가 돋보인다. 독일 작품을 한국적 상황에 맞춰 번안한 류주현 연출의 전작 ‘경남 창녕군 길곡면’처럼 이 작품도 번역이 아닌 번안으로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2만∼3만 원.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02-814-1678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