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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 사칭해 황씨 대질하면 바로 살해하려 했다”

입력 | 2010-04-22 03:00:00

■ 간첩 검거되기까지




작년부터 대외활동 본격화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21일 북한에서 자신을 암살하기 위해 보낸 공작원 2명이 검거됐다는 언론 보도를 접한 다음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서울 강남구 논현동 북한민주화위원회 사무실을 연 황 전 비서(오른쪽). 동아일보 자료 사진

‘황씨 9촌’ 행세한 동명관
건장한 체격 ‘침투교육’ 받은 티 나
南수사기관 과소평가 뒤늦게 후회

죽은 사람 이름 댄 김명호
학교주변 지형 묻자 말문 막혀

1974년생 동갑… 18년간 훈련
서해 침투작전 등서 공적 세워
김정일 이름 나오면 급히 부동자세


“그 학교 뒷산에 무엇이 있었나요?”

이달 초 경기 시흥시에 있는 탈북자중앙합동심문센터. 이곳은 탈북자가 한국에 오면 위장탈북 여부를 가리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곳이다.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총국 공작원 김명호 씨(36)는 질문 하나를 받는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나왔다고 주장한 인민학교(초등학교)의 뒷산 지형과 담장 등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캐묻자 말문이 막힌 것. 이미 사망한 ‘김명삼’의 이름을 빌려 그의 성장환경을 철저히 학습하고 출신 학교와 연고지를 답사했던 몇 년간의 공작훈련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김 씨와 함께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살해 지령을 받고 한국에 들어온 공작원 동명관 씨(36)도 합동심문센터 조사팀의 예리한 눈을 피하지 못했다. 황 전 비서의 9촌 ‘황명혁’이라고 주장한 그는 어릴 때 살았다던 고향의 지형과 이웃들에 대해 다른 탈북자들과 어긋나는 진술을 계속했다. 정찰총국에서 대남침투교육을 충실히 받은 건장한 체격도 눈에 띄었다.

○ 18년간 공작훈련 받은 베테랑들

21일 국가정보원과 검찰에 따르면 이들 두 사람의 성장환경은 매우 비슷하다. 1974년 함경남·북도의 평범한 가정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이들은 고향에서 고등중학교와 군사학교를 마친 뒤 1992년 인민무력부 옛 정찰국 전투원으로 선발됐다. 이후 서해에서 대남 침투로를 개척하는 등 수많은 작전에 투입돼 공적을 세웠다. 1992∼1997년 정찰국 소속 대학인 마동희군사대학을 다닌 뒤 1998년 조선노동당에 입당했고 2004년에도 함께 정찰총국 공작원으로 선발됐다. 김 씨는 중국 내 북한 접경지역의 지형 정찰, 상점·식당 이용방법 등에 대해 철저한 훈련을 받았다. 동 씨도 중국 운송업체에 화물운반 인부로 취업하는 등 중국 현지 적응훈련을 받았다.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이들에게 ‘배신자 황장엽의 목을 따오라’고 지시한 것은 지난해 11월. 황 씨의 언론 노출 및 대외활동이 잦아지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3남 김정은을 내세운 북한의 후계구도가 서서히 가시화되던 때였다. 이들은 곧바로 어둠을 틈타 두만강을 건넜고 중국에서 흩어져 은신했다. 중국 내 공작원과의 첫 접선은 암호로 이뤄졌다. 수차례 암호 대화로 신분을 확인한 공작원은 이들에게 탈북 브로커를 소개해줬다.

브로커들이 제시한 길은 중국을 가로질러 라오스를 거쳐 태국으로 들어가는 행로였다. 다른 탈북자들과 마찬가지로 15일간 기차와 도보로 이동하던 이들은 계획과 달리 도중에 만나버렸고 결국 함께 태국으로 들어갔다. 태국에서 한국행 의사를 밝힌 이들은 올 1, 2월 각각 한국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최종 임무수행에는 실패했다. 동 씨는 “황 씨 암살에 성공하면 투신자살하려 했다”고 진술했다.

○ 황장엽 친척 행세하다 되레 발목 잡혀

공작원 시절 동 씨는 황 씨의 친척으로 알려진 군 장교 황영명 씨의 신원과 성장환경 등에 대해 학습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에 들어온 뒤 장교 황 씨로 위장하려 했지만 그가 북한의 군사기밀을 많이 다루는 조직에서 일하고 있는 등 부담이 커 원래 학습한 인물 ‘김명혁’에서 성(姓)만 황 씨로 바꿔 위장했다. 탈북 동기에 대해서는 “황장엽 씨 친척이어서 북한에서 진급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수사 과정에서 동 씨는 황 씨의 친척을 사칭한 이유에 대해 “대질신문 과정에서 그를 만나면 곧바로 살해 지시를 수행할 수 있고 향후 탈북자 모임 등에서 그의 친척이라고 하면 언젠가 한 번은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대책을 너무 안이하게 세웠다.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 했는데”라며 한국 수사기관의 정보력을 과소평가해 황 씨의 친척을 사칭하다 오히려 의심을 산 상황을 후회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두 사람은 조사 과정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름이 거론되면 급히 부동자세를 취하는 등 김 위원장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이 몸에 배어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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