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비가 컴백을 앞두고 5일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KBS2 '개그콘서트(이하 개콘)'는 천안함 침몰사고 이후 한 달째 결방이다. 25일에도 방송되지 않으면 5주째 '대한민국을 웃기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개콘'만 그런게 아니다. '세바퀴' '무한도전' '우리 결혼했어요'(이상 MBC), '일요일이 좋다(패밀리가 떴다2, 골드미스가 간다)' '도전 1000곡'(이상 SBS),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 1박2일)'(KBS2) 등 주말 간판 오락 프로들이 줄줄이 2~4주째 결방이다. 방송 3사 음악 프로그램인 '인기가요(SBS)' '뮤직뱅크(KBS2)' '쇼! 음악중심(MBC)'도 올스톱이다.
천안함 침몰사고 후 "국가적 참사에 대한 국민 정서와 사회 분위기를 감안해 가요와 코미디 프로그램을 배제한다"는 방송사의 뜻에 고개를 끄덕였던 시청자들은 결방이 길어지자 술렁이기 시작했다. 일감이 끊긴 연예인들은 방송 재개만 기다리고 있다.
방송 결방으로 가요계는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4월은 대형 가수 비와 이효리부터 인기 상승중인 그룹 시크릿 ZE:A(제국의 아이들) 가수 길학미의 컴백이 예고돼 있었다.
비는 컴백을 앞두고 지난달 22일 티저 영상을 공개하고 MBC '쇼!음악중심' 사전 녹화에서 컴백 무대를 가졌다. 그러나 천안함 사고로 3일 방송이 결방되면서 자연스레 컴백이 늦춰졌다. 그의 공식 컴백 무대는 2주간 결방 후 가요 프로 중에는 8일 유일하게 방송을 재개한 케이블채널의 '엠 카운트 다운'이었다.
이날 프로그램에서는 비 말고도 시크릿, ZE:A 길학미 등 모두 4팀이 동시에 컴백했다. 지상파 가요 프로들이 모두 결방하고 있는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통상 스페셜로 꾸며지던 컴백무대는 일반 무대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효리는 8일로 예정됐던 4집 앨범 출시일을 13일로 연기하고 타이틀곡과 뮤직비디오 공개일정도 모두 늦췄다. 소속사 측은 '지상파 가요순위 프로그램 방송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앨범 발매를 진행할 경우 방송활동 전까지 간격이 발생해 무리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15일 천안함의 함미 인양작업이 진행되며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들이 결방하자 '엠 카운트 다운'으로 발길을 돌렸다.
'개콘'의 인기코너 '솔로천국 불신지옥'에 출연 중인 개그우먼 오나미는 "결방 후 코너 아이디어 생각하고 가끔 라디오 케이블채널에 출연하고 있다"며 "개콘에만 출연하는 후배 개그맨들이 많은데 그들은 '수입이 0원'이라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수 김C는 4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방송사들이 유독 예능 프로그램만 결방하는 것에 대해 쓴소리를 했다.
▶ 추모는 필요하지만 … 그때그때 다른 참사 대처 방식
오락과 가요 프로그램의 결방이 길어지자 시청자들은 "애도 기간인 만큼 당연하다" "오락 프로에서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 등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다. 오락 프로 대신 '7급공무원' '내 눈에 콩깍지' 등 코믹한 영화를 내보낸 방송사의 편성 방식을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비판하는 시청자들도 있다. 가수 김C도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스포츠도 되고 영화도 되고 드라마도 되고 예능은 안 되고. 웃지 말란 뜻인 건가? 이현령 비현령"이라며 일침을 가했다.
진보 정권 시절 발생한 2002년 서해 교전 때와 비교하는 누리꾼들도 있다. 한 누리꾼은 "서해 교전 때는 오락 프로들이 정상적으로 방송된 것으로 기억한다. 오히려 월드컵으로 축제분위기였다. 천안함 침몰사고와 서해교전의 차이는 무엇이냐"고 방송사의 원칙 없는 대응 방식을 비난했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하윤금 연구원도 KBI 총서 '2002 한일 월드컵 방송'에서 "서해교전 등의 주요한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월드컵 대화에 묻혀버렸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기약 없는 장기간 결방사태 △추모 프로그램의 부족 △적절한 대체 프로그램의 부재를 문제로 지적했다.
탁현민 한양대 문화컨텐츠학과 겸임교수는 "방송사들이 애도 기간을 정하고 그 기간 동안 자극적 요소가 많은 프로그램을 방송하지 않는다는 식의 기준을 정해 운영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기간 자체가 모호하고 기약도 없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탁 교수는 또 "오락 프로그램을 취소하면서 코미디 영화를 대체 편성하는 등 추모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은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며 "KBS가 추모 프로그램을 편성하긴 했지만 희생자들을 영웅으로 보이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 같다. 추모와 영웅화는 다르다"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황 교수도 "예능 프로그램은 안 되고 드라마는 된다는 식은 자의적이다. 드라마 중에서도 상업적인 것은 있을 수 있다"고 기준의 모호함을 지적했다.
SBS는 4일 '일요일이 좋다'를 결방하는 대신 강지환 이지아 주연의 코믹멜로영화 '내 눈에 콩깍지'를 방영했다.
▶ 미국의 경우…문화예술계 전반으로 확산된 애도 물결, 국민 위로한 오락 프로그램
전문가들은 우왕좌왕하는 한국 방송사들을 위해 오클라호마시티 청사 폭발 사고나 9·11 사태 때 미국 방송사들이 보여준 대응 방식이 참고할 만 하다고 제안했다.
9·11 테러 후 미국 주요 방송사들도 속보를 전하고 오락 프로그램을 취소하며 애도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기존 프로그램도 추모 분위기로 진지하게 진행했다. 드라마 '웨스트 윙'은 참사 분위기에 맞게 특별 에피소드를 제작해 방영하기도 했다.
케이블 채널들은 테러와 관련된 프로그램은 편성에서 제외했다. 라디오에서는 리 그린우드의 '갓 블레스 더 유에스에이(God Bless the U.S.A)'가 자주 흘러나왔다. 콘서트, 연극, 스포츠 경기도 취소됐으며 9월 16일 열릴 예정이던 제53회 에미상도 10월로 연기됐다.
애도 분위기가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확산된 반면 애도 기간은 길지 않았다. 테러 발생 나흘 뒤인 15일 뉴스 진행자들은 TV 오락 프로그램 편성표를 정상화하는 것은 '국가적 의무'라고 말하며 주말부터 편성이 정상화된다고 알렸다. 국민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오락 프로그램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의도였다. 애도 기간 중 없앴던 프로그램 광고도 정상화했다.
시기상조가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이에 대해 NBC West Coast의 스코트 사사 사장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청자들은 위로를 얻길 바랄 것"이라고 반박했다. 모션픽쳐스연합의 잭 발렌티 회장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할리우드는 영화와 TV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한다. 국가도 우리의 창작품을 필요로 한다"고 밝혔다.
김아연 기자ay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