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된 스토리에 블록버스터급 그래픽 입혀 ‘향수 마케팅’
쥐 삼키던 다이애나
녹색 피 파충류 외계인
미드 ‘V’의 귀환
이번엔 뭘 들고 찾아왔을까
1980년대 중반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들이 오줌을 지릴 정도로 꾼 악몽에는 대개 두 사람이 등장했다. 첫 번째는 죽은 지 3일이 넘지 않은 ‘덕대골의 무명(無名) 시체’. 한 여인이 무덤을 파고 시체의 다리를 잘라 도망가자 벌떡 일어나 뒤쫓아 오며 “내 다리 내놔”를 외친 ‘전설의 고향’ 최고의 ‘스타 귀신’이다. 두 번째는 쥐를 한 입에 넣고 맛있게 먹어 삼키는 다이애나. 미국 드라마 ‘브이(V)’의 최고 미녀지만 얼굴 피부를 벗겨 내면 끈적끈적한 점액과 소름끼치는 파충류 비늘이 드러나 결국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만다.
다리 잘린 시체가 등장하는 전설의 고향 ‘덕대골’편은 이미 1996년 리메이크 돼 20, 30대로 장성한 시청자들을 다시 만났다. 어렸을 땐 너무 무서워 실눈으로 TV를 봐야 했던 그들의 반응은 ‘글쎄’였다. 그때의 오금 저림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분명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 테지만 도무지 원작의 느낌이 나지 않아 아쉽다라는 반응이 많았다. 그리고 이제 2010년 4월, 악몽의 두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미녀 파충류 다이애나가 케이블 채널 CGV를 통해 30, 40대에게 돌아왔다. V가 리메이크 된 것. 25년 전 옆에 있는 친구가 파충류 외계인일지 모른다며 초록색 피인지, 붉은색 피 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곤충핀으로 손가락 끝을 찌르거나 피부를 벗겨보려 했던 그들을 과연 다시 TV 앞으로 끌어 모을 수 있을까.
하지만 원작의 외계인 파충류는 어느 날 갑자기 지구인 앞에 등장하지만 신작의 외계인들은 오래전부터 지구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던 것으로 그려진다. 그들은 지구의 정치, 종교, 언론, 경제 등 여러 분야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지구 침략을 위한 준비를 해 온 것으로 묘사된다.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쉽게 구분할 수 없는 이런 모습은 2001년 9·11테러 이후 더욱 불안해진 미국의 내부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분석된다.
원작은 독일 나치의 철십자 문장을 닮은 외계인들의 문양과 제복을 통해 나치즘을 묘사하는 메타포로 사용하기도 했다. 냉전주의가 극에 달했던 당시 이를 통해 군국주의나 나치즘을 비판하면서 외계인과 지구인의 선악 구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V의 원작자이자 프로듀서였던 스콧 피터스는 리메이크작에서 “과거의 내용을 되풀이하기보다는 지도자들의 감춰진 진실 앞에 선 대중에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어갈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검증된 스토리에 블록버스터급 그래픽 입혀 ‘향수 마케팅’
‘미드 리메이크 붐’ 이유는
‘2010 V’는 미국에서 첫 방송 당시 1400만 명의 시청자 수를 기록하면서 30분당 평균 28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등 상당한 화제를 모았다. 지금까지 4회 분량을 방송한 한국에서도 V 열풍은 그대로 이어졌다. 2일 첫 방송에서 시청률 2.33%(AGB닐슨)를 보이며 국내 ‘미드’(미국 드라마) 방송사상 첫 시즌 1회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특히 30대 남성이 시청률 2.91%, 점유율 30.3%로 폭발적인 주목도를 보였다. 다이애나와 맞서는 지구인 ‘도노번’, ‘줄리엣’ 등 원작의 강한 캐릭터들을 다시 볼 수는 없지만 그들의 잔상이 남아 있는 새로운 주인공들은 25년의 세월을 넘어 30, 40세대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인물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드라마를 보면 더욱 흥미진진하다. 원작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외계인 부사령관이자 과학자인 다이애나는 악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외모와 함께 차가우면서도 오만한 매력으로 최고의 인기를 모았다. 특히 빨간 제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V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였으며, 통째로 쥐를 삼키고 벗겨진 피부 사이로 드러났던 파충류 피부는 당시 어린이들에게 충격이었다.
2010 V의 애나는 외계인의 대표로 등장한다. 카리스마 넘치는 다이애나와 달리 언제나 교양 있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지구인들에게 접근한다. 미디어를 활용해 지구인들의 호감을 사는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그려진다. 특히 방문자들을 반대하던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호의적으로 돌아서게 만드는 등 군중 심리를 이용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하지만 아직 쥐를 먹는 장면이나 피부가 벗겨지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저항군을 이끄는 멋진 남성 도노번과 그를 좋아하면서 따르는 줄리엣은 2010 V에서 각각 잭과 에리카로 변신했다. 하지만 원작이 도노반 중심이었다면 리메이크작은 여성인 에리카가 중심이 된다. 현직 FBI 요원인 에리카가 저항군을 이끌며 가정을 지켜내는 것이 내용의 한 축이다. 남녀의 사회적 위상이 달라졌음을 반영한 듯하다.
○ 원작과 비교할 수 없는 첨단 CG
2010 V는 원작과 비교할 수 없는 첨단 컴퓨터그래픽(CG) 기술을 활용해 더욱 실감나는 영상을 구현해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첫 회에 나오는 전투기 폭발 장면과 미국 뉴욕 하늘을 뒤덮는 거대 우주선의 위용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버금갈 정도다. 이와 함께 인간의 피부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파충류 피부를 원작과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는 시청 포인트다.
○ 소재의 고갈 미드 리메이크로 이어져
V외에도 ‘전격Z작전’ ‘A특공대’ 등 1980년대 추억의 외화(미드)들이 리메이크돼 당시 ‘광팬’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이처럼 미드들이 리메이크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소재의 고갈이다. 그동안 다양한 장르의 시리즈를 양산했던 제작사들도 새로운 소재를 발굴해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스타를 찾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과거 흥행작들의 리메이크는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캐릭터나 설정을 통해 별다른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와 함께 기술의 발달에 따른 화려해진 영상미는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신선함을 동시에 전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둘째는 시청률에 대한 위험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CJ미디어의 손승애 팀장은 “이미 인기가 검증된 드라마들은 고정된 마니아층이 존재하고 있고, 또 옛 시절의 향수를 통해 손쉽게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불러 모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이유로 2010 V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영국, 스페인, 브라질, 호주 등 15개 나라에서 방영되고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 흥행을 담보한 작품임을 증명한 셈. 더군다나 세계적인 경제 불황 속에서 비용 대비 효율을 높이기 위해 리메이크 열풍이 부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리메이크 작품들이 모두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나이트 라이더’ ‘바이오닉 우먼’ 등이 각각 ‘전격Z작전’과 ‘소머즈’ 등 원작의 명성을 등에 업고 도전했지만 실패하기도 했다.
김기용 기자 kky@donga.com
디자인=김원중 기자 paran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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