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나물
‘어젯밤 좋은 비로 산채가 살쪘으니 광주리 옆에 끼고 산중을 들어가니 주먹 같은 고사리요 향기로운 곰취로다 빛 좋은 고비나물 맛 좋은 어아리다 도라지 굵은 것과 삽주순 연한 것을 낱낱이 캐어내어 국 끓이고 나물 무쳐 곰취 한 쌈 입에 넣고 국 한번 마시나니 입안의 맑은 향기 삼키기 아깝도다’
<작자 미상 ‘전원사시가’에서>
된장 풀어 국으로 끓여 먹어도 향이 은은하게 배어난다. 라면이나 우동 수제비 칼국수 끓일 때 생취 한줌 넣으면 맛의 품격이 달라진다. 금세 느끼한 느낌이 사라진다. 도토리묵 무칠 때 오이 상추 깻잎에다 생취 조금 넣으면 묵향이 상큼해진다.
밀가루에 취나물을 섞어 부침개를 부쳐 먹어도 맛있다. 강원 정선의 취떡은 그 향취와 독특한 맛으로 유명하다. 취나물고추장떡은 칼칼한 맛과 쌉싸름한 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생각만 해도 입안에 스르르 침이 고인다. 비 오는 날엔 더욱 몸이 달아 애가 탄다.
취나물은 국화과 여러해살이풀이다. 곰취 참취(나물취) 미역취(돼지나물) 개암취 마타리취 각시취 수리취(떡취·개취) 단풍취(장이나물) 병풍취 등이 있다. 가을에 보랏빛 꽃이 예쁜 개미취 벌개미취도 취나물이다. 요즘 시장에 나온 취나물은 대부분 비닐하우스나 밭에서 기른 것들이다. 부드럽지만 향은 야생취만큼 강렬하지 않다. 은근히 농약 검출도 걱정된다. 흐르는 물에 잘 씻는 수밖에 없다.
취나물무침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들깨 넣어 무치면 취나물들깨무침이고 두부 으깨 넣어 무치면 취나물두부무침이다. 김밥에 취나물 넣으면 취나물김밥이다. 그냥 살짝 데쳐서 초고추장에 무쳐 먹어도 된다. 주먹밥을 싸서 물김치와 함께 먹어도 맛이 기가 막히다.
곰취는 겨울잠을 깬 곰이 가장 먼저 뜯어먹는 풀이다. 곰이 아직도 추운 초봄께 동굴 속에서 잠을 자다가 배가 고프면 벌떡 일어나, 여린 곰취 싹을 핥고 기운을 차린다고도 한다. 잎이 영락없이 곰 발바닥을 닮았다. 그래서 곰취를 ‘웅소(熊蔬)’라고도 부른다. 곰은 지방이 많아 몸에 열이 많다. 곰취가 열을 내려주고 피를 맑게 해주는 것이다. 삼겹살을 곰취쌈으로 먹는 것도 느끼함을 가시게 하기 때문이다. 곰취김치 곰취절임 곰취장아찌도 있다.
곰취는 비닐하우스 재배가 어렵다. 높고 깊은 산에서 난다. 잎이 넓적하고 쓴맛도 다른 취나물보다 강하다. 살짝 삶는다는 느낌으로 좀 오래 데쳐야 한다. 고들고들한 고두밥을 싸서 먹는 곰취쌈밥이 일품이다. 깨소금과 마른 양념으로 버무린 고두밥을 곰취잎(데친 것)으로 둘둘 싸면 된다. 곰취쌈밥은 풀리지 않도록 둘둘 만 끝부분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 곰취쌈밥을 먹으려면 5월 중순쯤 강원평창의 진부부일식당(033-335-7232)이나 가야 맛볼 수 있다. 곰취장아찌는 서울 인사동 산촌(02-735-0312)에 가도 맛볼 수 있다.
강원 산간지방에선 중고교 시절 곰취쌈밥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닌 사람이 많다. 그들은 그때 점심을 먹은 게 아니라, 밥알에 스며든 곰취향을 먹었다. 곰취는 칼슘이 참취보다 2배 가까이 많아 뼈를 튼튼하게 해준다. 비타민A는 배추의 10배나 들어 있다. 기관지 폐를 튼튼하게 해주어 기침 천식에 효과가 있다. 고기가 탈 때 나오는 발암물질을 80% 이상 억제하는 효과도 있다. 한마디로 취나물은 무기질의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다.
참취는 시중에서 나물취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자로는 ‘향소(香蔬)’라고 한다. 취나물 가운데 으뜸이라고 참취다. ‘대보름날 아침에 참취로 오곡밥 싸먹으면 복이 온다’는 바로 그 나물이다. 백석 시인의 작품 ‘여승’에 나오는 ‘가지취’도 참취의 일종이다.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가지취의 냄새가 났다/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취’라는 이름은 나물 ‘채(菜)’나, 풀 ‘초(草)’가 변했다는 설이 있다. 냄새를 뜻하는 ‘취(臭)’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취나물은 나물이기도 하고, 풀이기도 하며, 또한 향도 강하다.
입안이 텁텁하다. 혀끝이 메마르다. 입천장은 꾸덕꾸덕하다. 목구멍으로 연신 마른 침만 넘어간다. 이럴 땐 뜨거운 밥에 취나물을 넣고 참기름양념으로 쓱쓱 비벼 먹으면 된다. 혀끝의 맛 세포들이 우우우 눈을 뜬다.
곰취죽이란 게 있다. 춘삼월 눈을 뚫고 나온 곰취의 여린 싹을 넣어 끓인다. 지리산 빨치산들이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먹던 것이었다. 빨치산들은 그 곰취죽을 먹으면서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불렀다던가. 곰이나 사람이나 배고프면 다 똑같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오늘도 안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백설희 노래>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