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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마흔여섯 송이의 봄꽃을 기리며

입력 | 2010-05-01 03:00:00


월하-이혁인 그림 제공 포털아트

봄인데도 이 땅에는 봄이 오지 못했습니다. 바람이 불고 기온이 떨어지고 장마철 같은 장대비가 내리기도 합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하나같이 울혈이 맺혀 언제 어느 곳에 있을지라도 마음이 쾌연하지 못합니다. 이 땅에서 나고 자라 이제 한창 만개해야 할 아름다운 마흔여섯 송이의 봄꽃이 하루아침에 산화했기 때문입니다. 그 차가운 밤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산산이 흩어져 산화하는 과정을 되새기는 일이 살아남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 피멍으로 맺혀 울혈을 풀 방도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 아픈 봄이 지나고 다른 봄이 돌아오면 그대들의 이름이 다시 꽃으로 피어날 수 있을까요.

봄이 오지 않는 봄, 우리는 그대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꽃씨로 가슴에 심습니다. 차가운 동토에서 생명의 기운을 잃지 않고 한 송이의 봄꽃이 피어나는 과정이 얼마나 우주적인지 우리는 압니다. 한 알의 씨앗이 꽃으로 피어나 우주만물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장관을 우리는 숱하게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꽃에 비유하고 꽃을 사람에 비유합니다. 젊음은 꽃 중의 꽃이요 인생의 꽃이니 그대들은 이 강산 곳곳에서 피어나 저마다 아름답게 만개한 봄꽃이었습니다. 하지만 봄꽃의 만개가 아무리 짧다고 해도 그대들의 산화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대들은 우리의 아들이고 남편이고 오빠이고 손자이고 친구입니다.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오고 유품만으로 저세상으로 보내버리기에는 아직 못 다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 가슴이 무너집니다. 아직 제대로 된 봄날은 오지도 않았는데 어찌 봄꽃이 이리도 허망하게 무더기로 떨어질 수 있나요. 동백꽃은 떨어져서도 붉디붉은 제 자태를 고스란히 유지한다지만 그대들의 인생은 아직 자태를 완성하기 전이고 자기 인생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중이었습니다. 꽃샘추위가 아무리 심하다 해도 피어나는 봄꽃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떨어뜨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자연의 섭리로 피어난 그대들의 산화를 도저히 자연의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대들의 이름이 이 땅의 역사 속에서 이 강산의 자연 속에서 하나하나 다시 피어나길 기원합니다. 그것을 위해 할머니 할아버지도 울고 어머니 아버지도 울고 형제자매와 친구들도 울고 있습니다. 가슴에 파종한 그대들의 이름, 고통의 영토에서 다시 피어나 무궁화처럼 만개하길 빕니다. 그것만이 그대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걸 우리는 압니다.

햇볕에 빛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젖으면 신화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들이 우리에게 남긴 아름다운 삶과 날벼락 같은 희생은 역사로도 신화로도 보상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대들은 엊그제까지 우리 곁에 함께 머물던 가족이고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절친하고 애틋한 이름을 어떻게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있나요. 그대들을 보내는 날 세상에는 하염없이 비가 내렸습니다. 그 빗줄기를 바라보며 우리는 그대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소중한 꽃씨로 가슴에 파종했습니다. 마흔여섯 송이의 꽃, 우리 곁에서 산 자의 도리와 책무를 생각하게 하는 진정한 꽃으로 다시 피어나길 빕니다. 고이 잠드소서.

박상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