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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박영균]국가 신용평가

입력 | 2010-05-01 03:00:00


1997년 한보철강 삼미 진로의 부도에 이어 자금난에 빠진 기아자동차 사태가 장기화하자 대외신인도가 휘청거렸다. 무디스는 기아사태가 터지자 한국을 ‘요주의 리스트’에 포함시켰고,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신용등급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 기아차 법정 관리가 신청된 그해 10월 S&P는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낮춘 뒤 바로 A-로 한 단계 더 떨어뜨렸다. 한국의 신용등급이 떨어지자 외국 자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빠져나갔다. 외환위기의 시작이었다.

▷무디스 S&P 등 미국 신용평가회사의 힘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막강했다. 무디스는 1997년 말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무려 7단계나 한국의 신용등급을 낮추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으로 위기를 벗어난 뒤에도 신용등급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 다음해 무디스의 조사단이 수차례 한국을 찾았다. 그들은 올 때마다 정부와 재계의 고위층을 만났지만 등급 조정에는 인색했다. 외환위기 이전의 신용등급을 회복한 것은 무려 13년 만인 올해 4월이었다.

▷외환위기 때 일각에서 신용등급 강등에 미국 월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확인하기는 어려운 사안이었다. 주로 유럽계 금융기관 쪽에서 그런 의견이 나왔다. 최근 미국 상원에서도 신용평가회사를 평가해야 한다는 질타가 쏟아졌다. 미국 상원의 칼 레빈 조사소위원장은 “신용평가회사들이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신 월가가 등급 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고 비판했다. 결국 이 같은 도덕적 해이가 미국 금융위기를 초래하는 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교수는 금융위기가 부패한 시스템의 결과이고 신용평가회사들은 그 부패의 주요한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신용평가회사들이 그리스 포르투갈에 이어 경제규모 유럽 4위인 스페인의 신용등급마저 낮추자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와 유럽중앙은행은 즉각 반발했다. 유럽의 독자적 신용평가기구를 만들자는 말도 있었다.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IMF 총재도 신용평가회사들의 신뢰도에 의문을 제기했다. 미국과 EU는 신용평가회사를 규제하는 법안을 마련 중이다. 신용평가회사들의 신용등급 평가를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궁지에 빠진 국가들에는 거의 죽음의 신처럼 위협적인 존재임에 틀림없다.

박영균 논설위원 parky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