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이나 지난 일이니 허정무 감독은 벌써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축구대표팀 코치로 1994년 미국월드컵 출전을 앞두고 있던 허 감독이 친하게 지냈던 한 축구 담당 기자와 함께 점(占)보는 집을 찾았던 일이다.
필자의 선배였던 그 기자를 통해 들은 얘기는 당시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점쟁이를 찾아 갔지만 결국 허 감독이 점괘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이야기를 듣고 "허 감독이 점까지 볼 생각을 했다니,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1994년 미국월드컵 때 한국은 바로 전 대회 우승팀 독일, 유럽의 강호 스페인, 그리고 미국에서 가까운 볼리비아와 같은 조에 속해 힘든 경기가 예상됐다.
때문에 당시 김호 감독을 보좌해 코치를 맡고 있던 허 감독은 한국팀이 어떤 결과를 낼 수 있을지 궁금했을 게 틀림없다.
한국은 미국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스페인과의 첫 경기에서 2-2로 무승부를 이뤘고 볼리비아 전에서는 경기의 주도권을 쥐고도 득점에 실패해 0-0으로 비겼다. 또 독일에게는 2-3으로 아깝게 패했다. 결과적으로 당시로서는 월드컵 출전 사상 가장 좋은 성적을 거뒀다.
코치 때도 그랬는데 감독이 된 지금 허 감독의 스트레스는 더 심할 듯하다.
하지만 우리와 16강 진출을 놓고 맞붙게 될 그리스,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의 감독들 면면을 살펴보면 허 감독은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 같다.
물론 그리스의 오토 레하겔 감독, 아르헨티나의 디에고 마라도나 감독, 나이지리아의 라르스 라거백 감독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 지도자들이다. 그러나 연륜이나 연령 모든 면을 고려했을 때 현재 최고조에 올라 있는 이는 한국의 허정무 감독이다.
우선 그리스의 레하겔 감독은 그의 이름인 '오토'를 연상시키는 '오토크라시(autocracy·독재권)'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는 이번 남아공월드컵 출전국 지도자 중 최고령인 71세. 9년 째 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있는 '할아버지 감독'이 이번에도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런지 의문이다.
3월 1일부터 나이지리아대표팀을 지도하게 된 라거백 감독. 스웨덴 출신으로 올해 만 62세인 라거백 감독은 1990년 스웨덴 청소년대표팀을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스웨덴 대표팀을 이끌어온 명장이지만, 나이지리아 팀을 맡은 지 3개월 여 만에 월드컵에 출전하기 때문에 자신의 지도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시 되고 있다.
이들에 비해 허 감독은 올해 55세로 지도자로서 적당한 연령인 데다, 1989년부터 대표팀 트레이너와 코치, 올림픽대표팀 감독, 프로 감독 등을 거치며 쌓은 지도 능력이 전성기를 맞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축구에서는 감독의 리더십과 전략이 승패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축구 인생' 정점에 올라 있는 허정무 감독에게 '국외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첫 16강 진출'이라는 목표 달성을 기대해봄직하다.
권순일 기자 stt7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