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 방송 뉴미디어를 넘나드는 판화아트● "판화의 미래는 바로 현대 미술의 미래다"
앤디워홀의 자화상(리넨에 아크릴과 실크스크린.1986년작)
전체 촬영분량의 80%에 등장하는 2층짜리 대저택이 바로 그것. 이 거대한 대저택 세트에는 벽마다 고가의 미술품이 장식돼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중심에는 판화작품이 자리한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에 'LOVE'라는 이름으로 협찬표기까지 된 이 작품은 팝아트의 대가 로버트 인디애나의 걸작이다. 영화사 측에서 지인을 통해 직접 공수해온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작품으로 현장 스태프 모두가 제작비에 버금가는 이 작품의 훼손을 막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는 후문이다.
판화가 오윤(1946∼1986·사진 왼쪽)과 그의 작품 ‘모자’(1979·오른쪽)
애당초 복제를 위해 만들어진 판화 한 장이 수십억 원을 한다는 사실은 한국 문화계에서 더 이상 신기한 현상이 아니다.
마릴린 먼로의 얼굴이나 캠밸수프 통조림 등의 이미지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현대미술의 거장 '앤디 워홀'의 작품 모두가 판화이기 때문이다. 앤디워홀 타계 20주년인 2007년 이후 한국에서도 불기 시작한 앤디워홀 붐은 이례적일 정도였는데, 얼마 전 서울옥션 경매에서 그의 실크스크린화 '자화상'(1986년)은 무려 27억 원에 낙찰돼 국내에서 경매된 외국작품 중 최고기록을 세웠을 정도다.
그럼에도 판화작품은 회화나 조각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하면서도 작품성은 크게 뒤지지 않아 미술품 수집 초보자들에게 매력적인 아이템으로 부각되고 있다. 거래되는 작품도 크게 증가했다.
판화란 복제가 가능한 대중적인 미술작품을 목표로 한 기계 발명의 미디어적인 확장으로 보면 이해가 쉽다. 넓게 보면 책을 만드는 인쇄술이나 동양의 전각(도장), 심지어 디지털 기술까지도 판화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적지 않다.
'복제가능성'은 판화작가들에게는 머니게임에서 벗어난 새로운 상상력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실제 상업디자이너였던 앤디 워홀 역시 판화를 고상한 미술로 생각한 적이 없고, 스스로의 작업실을 '공장(Factory)'이라 부를 정도로 대량생산 자체를 작품의 주된 모티브로 삼았다(오늘날 값비싸게 거래되는 작품들은 실크스크린으로 인쇄된 뒤 워홀이 직접 붓으로 덧칠해 마무리한 것이다).
■ 판화는 이제 뉴미디어, CF에 등장한 판화작품
따뜻한 수제 목판화 기법이 활용된 예다함
요즈음 서울 안국동에서는 판화의 미래를 한눈에 보여주는 전시회가 한창이다. 사비나 미술관이 4월17일부터 5월23일까지 여는 '네오 센스(NEO SENSE·新 감각)-일루전에서 3D까지'가 그것. 영화 '아바타'의 흥행으로 시작된 3D에 대한 높은 관심을 현대미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작업한 작가 11명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들은 시각적 환영을 유도하는 설치부터 가상공간에 대한 간접적 체험영상까지, 입체감에 대한 열망을 작가적 상상으로 풀어냈다. 이런 설치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판화기법이기도 하다. 입체 판화로 알려진 새로운 기법이 다수 소개되고, 한국미술의 영역을 넓히는 최전선의 실험을 보여준다.
판화는 전시공간을 넘어 방송을 통해서도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기도 한다. 최근 방영된 '예다함'의 CF는 목판화의 따뜻한 장면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파격을 선보였다. 값비싼 연예인 모델을 내세우지 않고도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을 재확인한 셈이다. 수작업으로 섬세하게 만든 판화 미술은 디지털 시대에 부족한 인간미를 메워주고 있다는 평가다.
이 작 업을 진행한 홍익대 백승관 교수는 "모처럼 방송을 통해 판화작품을 선보일 기회가 있다고 해 용기를 내 도전하게 됐다"면서 "익숙한 이미지의 의미 없는 반복보다 미술기법을 이용한 상업예술에도 편견 없는 시선을 보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인터뷰] "판화의 미래가 다름아닌 현대 미술의 미래다" - 백승관 홍익대 교수
백승 교수
- 디지털 미디어 시대 판화가 재조명 받고 있다
- 어떤 변화들이 인상적인가?
"판화가 점차 디지털로 확장돼 나아간다는 점이다. 과거 판화가 동판, 석판, 실크스크린 등 소재에 따라 구분이 됐다면 현대 판화는 압도적으로 디지털 분야로 확장해 매체를 활용한 방식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젊은 판화작가들은 컴퓨터 매체를 이용한 믹스 미디어, 즉 혼합 기법의 판화를 추구하고 있다. 아마도 판화가 미래 미술의 가능성을 열어 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단적인 예로 이화여대만 해도 기존 '서양화과'로 말하지 않고 '회화판화미디어과'로 명칭을 바꾸었다. 조선대는 디지털미디어판화과로 개명했다. 이런 것은 전통적인 판화의 장점을 전통 미술이 받아들인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판화 자체도 변신했다. 2년마다 한 번씩 공간국제비엔날레에서도 기존의 작가들은 고집스럽게 전통적 방식을 고수한다고 해왔는데, 지난번(2008년)부터 젊은이들이 뉴미디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변화를 거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 경매에서 회화보다 판화가 더 많이 팔리기도 한다.
"고무적인 현상이다. 시민들이 판화뿐 아니라 미술 작품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 차제가 국민 수준도 함께 올라간다는 의미다. 물론 그 시장은 아직도 작다. 수많은 작가들이 치열한 경쟁에도 불구하고 조명 받지 못하고 돈 되는 디자인이나 일러스트로 영역을 확장해 가기도 한다. 이또한 어찌됐건 판화의 영역이 무궁무진함을 입증하는 사례가 될 수 있다."
예다함 광고 중 한 장면
- 해외 팝아트 작품들이 고가에 형성돼 있는 데 반해 국내 판화작가들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데….
"아쉬운 대목이다. '행복한 눈물(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으로 삼성그룹이 비자금으로 구입했다 하여 화제가 됐다)' 같은 경우는 국내 대기업이 나섰기 때문인지 가격에 거품이 일었다. 그리 높게 평가할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현대미술은 아직도 새로운 시도를 하는 중이다. 판화에서 매체의 확장을 주도해가고 있다. 그런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봐주면 좋겠다."
- 판화를 알리겠다는 생각에서 CF도 찍은 것인가?
정호재 기자demi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