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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이태진]역사의 진실이 日양심 움직였다

입력 | 2010-05-12 03:00:00

‘한일병합은 원천무효’ 한일 지식인 성명 나오기까지

작년 12월 전화를 받았다
‘공동성명을 준비중’이라는…
나는 귀를 의심하면서도
“아 이제 그 순간이…”
환희가 솟구침을 느꼈다




작년 12월도 다 저물어가는 어느 날 김영호 유한대 총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한국 강제병합 100년에 즈음해 한일 양국 지식인의 공동성명 발표를 일본의 몇몇 지인과 의논하고 돌아왔는데 조만간 만나자고 했다. 나는 귀를 의심하면서도 “아, 이제 그 순간이…” 하는 환희가 솟구침을 느꼈다. 근 20년 한국병합은 성립하지 않았다는 절대무효론을 펴면서 외로운 투쟁을 해왔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이자 역사학도인 김영호 총장은 조약의 형식과 절차에 관한 내 논문을 읽고 충격을 받은 것이 일본 지인과의 대화에 나선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일본 교토의 ‘한국병합을 생각하는 시민 네트워크’ 초청을 받아 ‘한국병합 성립하지 않았다’는 제목으로 작년 10월 10일 강연을 했다.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빼앗아간 관련 조약의 문서 상태를 사진으로 하나씩 보여주면서 이렇게 무법이 난무한 상태인데도 합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반문으로 강연을 마쳤다. 청중 가운데 몇 사람이 일어나 일본인의 후손으로 너무 부끄럽다고 소감을 말했다. 이런 만행이 한국학계에서 밝혀진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왜 일본 교수들은 일본 국민에게 알려주지 않았느냐는 자조의 탄식까지 곁들였다.

도쿄에서 1993년 열린 국제학술회의 ‘한국병합 어떻게 이루어졌던가?’에 갔을 때의 체험은 이와 전혀 달랐다. 이때는 1907년 11월 18일부터 2개월간 일본 통감부가 대한제국의 통치를 통감부 통감에 예속시키는 관계 칙령, 법령에 가해진 순종황제의 이름자(척) 서명 위조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하나여야 할 황제의 서명 필체가 여섯 가지나 되는 점을 발견하고 그중 한 필체의 주인을 추적하여 얻은 결과에 관한 발표였다. 추적 대상은 통감부 문서과장을 지낸 경력의 소유자로서, 이것이 입증되면 통감부가 황제 서명 위조의 주체임을 밝히는 연구였다. 멀리 규슈대까지 날아가 자료를 확보하여 얻은 추적 결과를 OHP를 이용해 위조된 서명의 한 필적 위에 겹쳐 놓았을 때 300명이 넘는 일본인 청중은 일제히 탄성을 쏟아냈다.

발표 후 휴식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선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가면서 악수를 청하였는데 수가 100명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명함을 주고 지나간 신문기자만도 30명이 넘었다. 나는 이튿날 조간신문에 내 발표가 대서특필될 줄로 믿었다.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어느 신문도 관련 보도를 내지 않았다. 나는 이때 일본이 무엇인가를 크게 배웠다. 2009년 10월의 교토 시민네트워크의 반응은 일본인에 대한 그 쓴 기억을 치유해 주는 것이어서 감회가 더 컸다.

1990년대 초 일본의 경제력은 동아시아에서 절대적으로 컸다. 그 후 근 20년간 한국과 중국의 경제가 괄목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2009년 10월 교토에서 확인한 일본 시민 의식의 변화에는 이런 동아시아의 형세 변화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김영호 선생이 전한 일본 지식인의 새로운 움직임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일까.

나는 지난달 18일 다시 도쿄로 불려가 다른 시민연대 모임에서 교토에서와 똑같은 내용을 발표하였다. 130명이 넘은 청중은 또 다른 분위기를 보여 주었다. 100년 전 저들의 선조가 저질렀던 부당 불법한 행위가 낱낱이 밝혀지는 점에 대해 오히려 후련함을 느끼는 듯했다. 그들은 진실이 밝혀지고 이에 복종함으로써 진정한 우호관계가 확립되는 순간이 오기를 더 기대하는 듯했다. 이번에 일본 지식인 100명을 움직이게 한 것도 바로 이와 꼭 같은 역사의 진실에 대한 존중과 복종이라고 믿는다.

이태진 서울대 한국사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