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O2칼럼/정주현]전쟁의 또 다른 얼굴 …2% 부족한 ‘브라더스’

입력 | 2010-05-13 15:00:00


전장으로 떠났다 돌아온 남자의 고통과 그의 부재를 힘겹게 견딘 남은 가족의 슬픔을 그린 영화 \'브라더스\'.



지난 2005년 소개되었던 덴마크 감독 수잔 비에르의 원작을 본 사람이라면 얼마 전 개봉한 할리우드판 리메이크 '브라더스'에 적잖이 실망했을 지도 모르겠다. '나의 왼발' '아버지의 이름으로' 등 수작들을 남기며 일명 가족영화의 대가라 불리는 짐 쉐리단이 연출을 맡고 토비 맥과이어, 나탈리 포트먼, 제이크 질렌할 등 할리우드 초특급 스타들이 출연했지만, 소재와 설정 그리고 미장센까지 모두 차용한 이 판박이형 리메이크는 정작 중요한 것들에 인색한 오류를 범했다.

▶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었던 '떠난 자'

줄거리는 이렇다. 어려서부터 건실한 아들로 주변의 사랑을 받았던 형과 반대로 말썽꾸러기 사고뭉치로 부모의 속을 썩이던 동생이 있다. 미 해군으로 복무 중인 형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을 나가고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동생은 출소를 한다. 전장에서 형이 헬기 추락으로 사망하자 동생은 남겨진 형수와 조카들을 돌본다.

상실의 슬픔을 딛고 동생이 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을 즈음, 죽은 줄 알았던 형이 살아 돌아온다. 그러나 형은 이전의 형이 아니다. 눈빛은 공허하고, 아이들과는 서먹하며, 아내와 동생 사이 불륜을 의심한다. 급기야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던 형은 총기로 난동을 부리고, 아내는 남편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동료를 제 손으로 때려 죽여야 했던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줄거리에서 볼 수 있듯 이 영화는 제목과 달리 꽤 충격적인 영화다. 겉으로는 가족과 형제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전쟁의 잔인함과 딜레마가 함께 담겨 있다. 따스한 가장이던 한 남자는 끔찍한 전쟁의 잔상으로 망가져버리고 단란했던 가족은 불행해진다. 우애가 깊었던 형제는 의심과 반목의 대상이 된다. 그저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던 이 모든 소시민들에게 불행이 닥치지만 그 누구에게도 책임은 없다. 심지어 형을 포로로 붙잡았던 아프가니스탄의 반군들조차, 죽이지 않으면 죽게 되는 잔인한 전쟁에서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는 중이었을 뿐이다.

원작을 연출했던 수잔 비에르는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심리묘사를 거칠고도 치밀하게 그려냈다. 우리가 종종 '역사의 흐름'이라는 포괄적인 단어로 표현하는 상황적 비극은 미워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더욱 괴롭기 마련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한 일반 범죄와는 달리, 이러한 상황의 희생자들은 불행에 대해 비난할 대상, 즉 자신들의 슬픔과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더욱 아픔을 치유하기 힘들어진다. 원작의 감독은 이러한 상황에서 생겨나는 인간관계의 분열을 정교하게 파헤쳤다.

형은 부하를 잔혹하게 때려 죽였다. 하지만 자신이 죽이지 않는다 해도 어차피 반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대로 둘 다 죽느니 본인이라도 살아나가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보고 싶은 가족 때문이었다. 그렇게 처절하게 집에 돌아왔는데, 가족은 자신의 빈자리를 채운 동생과 함께 너무도 평온해 보인다. 다시 파병을 보내 달라 부탁하는 그의 눈빛에는 부하를 죽인 죄책감과 비극을 이해 받지 못하는 외로움만이 가득하다. 그가 집요하게 동생과 아내 사이를 의심하고 심지어 총을 들고 난동을 부린다 한들, 그 누가 형을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던 소시민들에게 불행이 닥치지만 그 누구에게도 책임은 없다. 그래서 전쟁은 더욱 잔인하다.



▶ 고통 속에 새롭게 가족이 된 '남은 자'

남겨진 자들 역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사랑하는 형이자 남편이며 다정한 아빠를 잃은 가족들은 함께 슬픔을 극복하며 서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서로에 대한 편견이 무너졌고 유대는 강해졌으며 자연스럽게 새로운 가족의 형태가 자리 잡았다. 잠시 동생과 형수 사이에 야릇한 순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들에게 변한 형이 돌아왔을 때 그를 이방인처럼 느낀다 한들, 이들에게 과연 그 책임이 있는가.

원작에서는 이러한 질문이 그물망처럼 촘촘히 얽혀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그러나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의 당혹감,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강요한 위선, 그로 인한 죄책감, 지키고 싶어 돌아온 자리가 이미 채워져 있음을 발견했을 때의 분노와 배신감 등. 인물들의 다양한 감정이 어우러지면서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변화시킨다. 숨겨진 진실이 수면위로 드러난다 해도 이는 이미 상처를 치유할 열쇠가 될 수 없다. 진실을 알고 모르는 것과는 상관없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슬프게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게 안타깝고 애절한 여운을 남기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짐 쉐리단은 그토록 복잡미묘한 사람들 사이의 화학작용을 상당 부분 단순화시켰다. 그리고 이는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에는 거의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원작과는 다른 변화를 주었기 때문이다.

먼저 '형수와 동생이 잤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 질문은 일견 저속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관계를 구체화시키는 결정적인 쟁점이기도 하다. 원작에서 이 질문은 물음표로 남는다. 형수와 동생 사이 감정의 교류는 분명히 감지되지만, 이것이 실제적 관계로 발전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실 이 행위 자체의 사실성이나 정당성을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이 물음표로 남겨졌다는 것은 이 둘 사이의 관계에 어떠한 선이 그어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따라서 어떠한 가능성도 열려있다는 의미가 된다. 남편의 의구심 역시 더욱 아슬아슬한 긴장을 유발하게 된다.

반면 쉐리단은 이 질문에 대해 단 한번 키스만 했을 뿐이라고 단호하게 못 박는다. 가족이라는 가치에 대한 할리우드의 도덕적 강박 때문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분명해지는 순간, 형의 의구심은 배신감과 외로움이 점철된 복합적인 심리상태에서 전쟁의 비극으로 인한 고통의 표출로 무게 중심이 급격히 옮겨진다. 그리고 그토록 숨막히게 갈등하던 인물 사이의 복잡한 관계는 느닷없이 전쟁에 대한 형의 독백으로 모이며 끝나버린다. 순응도 화해도 여운도 없는 결말이 허망하다.

▶ 가족의 이름으로 전쟁을 논하다

둘째로 전쟁에 대한 묘사를 어느 수위까지 다루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원작의 리메이크를 결정하던 그 순간부터 짐 쉐리단에게 작지 않은 고민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원작의 배경인 덴마크와는 달리, 미국은 전 세계 전쟁의 직접적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전쟁에 대한 부담을 의도적으로 덜어버리려 했던 것 같다. 원작과 비교해보면 형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의 일들은 상당 부문 지워져 있다. 동료들과 오랜 시간 어두운 감옥에서 포로로 지내던 때의 사투, 삶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해 주었던 가족에 대한 집착,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부하를 몽둥이로 치던 순간의 광기…. 이 모든 것들은 상당 부문 생략되거나 간소화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더욱 절절하고 안타까웠던 형의 고뇌 역시 희석되었다.

원작과 분리해 이 영화 하나만을 놓고 본다면, 이 작품에 대해 훨씬 관대한 평가를 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잘 만든 영화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것을 생략하고 압축한 것은 관객들에게 질문을 돌리려 했던 감독의 의도일 수도 있다. 단, 그러기에는 사건과 인물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몰입할 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다.

가족의 이름으로 전쟁을 논하는 '브라더스'는 풀리지 않는 숙제 같은 영화이다. 하지만 한 가지 메시지는 분명하다. 전쟁이란 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이 사는 사회 깊숙한 곳에서도 피할 수 없는 비극이라는 것.

그 비통함이 유난히 더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은 아마도 우리가 천안함 사고로 너무도 잔인한 3월과 4월을 보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영화의 후반부, 형은 극한의 고통을 쏟아내며 가족들에게 말한다. 자막에는 '질식할 것 같아'로 번역된 이 말.
"I'm drowning(나는 가라앉고 있어)."


정주현 영화진흥위원회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