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부터 영국 BBC에서 제작, 방영되는 드라마 \'닥터후\' 5번째 시리즈. "닥터"(The Doctor)라고 알려진 신비한 외계인이 파란색 전화박스 모양으로 생긴 타임 머신(타디스)을 타고 겪는 모험을 그리고 있다. 왼쪽부터 에이미 폰드(카렌 길런)와 닥터(맷 스미스)
영국 BBC의 인기 드라마 '닥터후'(Doctor who)의 다섯 번째 시리즈가 4월부터 현지 방송 중이다. '닥터후'는 1963년부터 제작된 SF드라마로 행성 갈리프레이에서 온 900살 먹은 외계인 닥터가 공중전화 모양의 타임머신 겸 우주선 '타디스'를 타고 미래와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며 겪는 모험담을 그린 작품이다. 1990년대 중반 시리즈가 중단됐다가 2005년 다시 제작돼 이전 시리즈를 '올드 닥터', 이후 시리즈를 '뉴 닥터'라고 부른다. 뉴 닥터 시리즈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으며 시즌4는 지난해 서울 드라마 어워즈에서 최고 인기 외국 드라마상을 받았다.
이번 시리즈의 최대 특징은 주인공 닥터의 얼굴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10대 닥터로 세계적인 인기를 끈 톱스타 데이빗 테넌트(39)가 퇴장하고 신예 매트 스미스(28)가 등장했다. 외계종족 '타임로드'인 닥터는 수명이 인간보다 훨씬 길지만 몸이 늙거나 다쳐서 죽을 고비에 있으면 모습이 바뀐다. 이를 두고 '재생성'이라고 하는데 극에서는 배우가 바뀐다. 닥터의 변신에 맞춰 그가 타고 다니는 공중전화 박스 모양의 타임머신 '타디스'의 내부도 모던하게 변신했다. 닥터의 조력자 에이미 폰드는 빨간 머리에 주근깨가 귀여운 모델 출신 배우 카렌 길런(22)이 맡았다.
그동안 각본과 제작 책임을 맡았던 러셀 T. 데이비스가 떠나고 그의 밑에서 일부 에피소드의 각본을 썼던 스티븐 모팻이 전적으로 각본과 제작 책임을 맡았다. 모팻은 '닥터 후'를 맡기 위해 스티븐 스필버그의 신작 시나리오 작업을 포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새로운 제작진과 배우가 함께 닥터후의 영광을 이어간다는 전략이다.
닥터와 조력자는 '타디스'라 불리는 일종의 타임 머신을 타고 이동한다. 타디스는 겉보기엔 파란색 경찰전화박스로 보이나 내부는 넓직한 공간이다.
▶ 재기발랄한 젊은 닥터와 아름다운 조력자 에이미
4월 3일부터 영국 BBC 1에서 방영을 시작한 닥터 후 5번째 시리즈는 미국에서도 BBC 아메리카를 통해 4월 17일부터 방영되고 있다.
1회의 제목은 11번째 닥터를 의미하듯 '11번째 시간'이었는데 닥터와 파트너인 에이미 폰드의 첫 만남을 그렸다. 마치 영화 '시간 여행자의 아내'처럼 막 재생성을 끝낸 닥터는 어린 소녀 에이미의 눈앞에 나타나 특유의 수다로 배가 고프다며 이것저것 음식을 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잠시 후 돌아온다고 하고 성인이 된 에이미 앞에 다시 나타난다. 닥터에게는 잠시였지만 에이미는 10년 이상이 흘렀던 것. 그동안 닥터의 존재를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던 에이미는 정신과 상담을 받는 등 인생이 엉망진창이 됐다.
4, 5회는 시리즈4에 나왔던 리버송 교수(알렉스 킹스턴)가 다시 나오고 닥터 일행을 위협하는 적으로는 시리즈3에 나왔던 '우는 천사'가 등장했다. 우는 천사들은, 눈으로 보고 있을 때는 그저 천사 석고상이지만. 어둠 속에 있거나 눈을 감아 동상을 볼 수 없을 때는 살수를 뻗치는 무서운 외계인이다.
이번 시리즈의 최대 '떡밥'은 차원의 틈을 일컫는 '크랙'이다. 이 틈으로 악당들이 빨려 나가고 또한 다른 세계에서 이상한 외계인들이 들어온다. 이상한 점은 크랙이 줄곧 에이미가 가는 곳 마다 따라다닌다는 것. 아직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시리즈 말미에 해답을 줄 것으로 보인다. 리버송 교수도 5회에서 닥터와 헤어지면서 "판도리카가 열릴 때 다시 만날 거예요"라고 알쏭달쏭한 소리를 했다.
외계인에 맞서 지구를 구하는 새 닥터 맷 스미스는 약간 조증이 걸린 사람처럼 수다스럽고 신난 괴짜 닥터의 면모를 잘 살리고 있다. 11대 닥터는 얼굴은 변했으나 정신없는 성격은 10대 그대로인 듯 했다. 원래 프로듀서들이 11대 닥터를 뽑을 때 나이가 조금 있는 사람으로 뽑으려 했지만 맷이 맛깔 나게 대사를 읽자 계획을 바꾸고 바로 그를 낙점했다고 한다.
맷의 우락부락한 얼굴을 보고 처음에 겁에 질렸다는 여주인공 에이미 역의 길런은 언론인터뷰에서 "그의 친절하고 편안한 성격 덕분에 이제는 아주 궁합이 잘 맞는다"고 말했다. 이에 스미스는 "전 이제는 완전 머저리가 되었어요"라고 응수할 정도로 두 사람은 호흡도 잘 맞는다.
최신작인 6회 '베니스의 뱀파이어' 편. 기숙학교에 입학한 여학생들이 뱀파이어처럼 변하는 이야기다.
▶ 10대 테넌트 뛰어넘는 닥터 만드는 게 스미스의 최대 과제
닥터후의 인기가 전만 못한 이유는 시청자들이 새 닥터의 얼굴에 덜 익숙해서 인 것으로 분석된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아직도 테넌트를 그리워하는 골수팬들의 글을 심심찮게 읽을 수 있다.
테넌트는 뉴 시리즈 2부터 4, 그리고 2009년 4편의 스페셜 분 등 지난 5년 간 닥터로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펼쳐 팬들 사이에선 '닥터=테넌트'라는 등식이 자연스럽다. 실제로 지난해 그는 '닥터후 매거진' 독자들이 뽑은 "역사상 최고의 닥터"에 선정됐다. 테넌트의 열연에 닥터는 1억 파운드의 브랜드 가치를 지닌 상품으로 재생성됐다.
게다가 그는 전 시리즈 닥터에게 없던 '섹시한 이미지'를 역할에 부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국 가디언지는 "테넌트의 닥터는 닥터 사상 처음으로 섹스 심볼이 됐다"고 분석했다. 극 중 키스도 여배우들도 포옹도 많았다. 그는 대니얼 크래이그와 주드 로, 로버트 패턴슨 등 기라성 같은 미남 스타를 제치고 '헬로우 매거진 2009년 베스트 드레서' 1위에 뽑히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테넌트는 닥터 이미지가 너무 강해질 것을 두려워해 하차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떠난 후 '닥터후'를 책임지게 될 후배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시청자들이야 처음에는 '오 분명히 예전 같지 않을 거야'라고 하겠지만 그러다 몇 주 지나면 익숙해져서 '우와~ 맷 스미스 너무 멋져' 이런 반응일 거다"라고 영국 언론 타임즈에 말했다.
테넌트를 뛰어 넘는 자기만의 독특한 닥터를 만드는 게 스미스에게 주어진 최대 과제일 것이다.
지난 5년 간 테넌트는 '분노' '슬픔' '고통' '사랑' 등 수 많은 감정을 표현하면서 복잡한 캐릭터를 만들어 갔지만, 스미스는 이제 시작이기에 그의 연기가 어색하다고 느껴졌을 수도 있다.
10대 닥터 데이빗 테넌트(오른쪽)와 조력자 마사 존스 역의 프리마 애즈맨.
▶ '천재' 각본가 러셀 T. 데이비스의 빈 자리, 그리고 '닥터후'의 대중화
'닥터후'의 성공 이면에는 각본을 담당한 러셀 T.데이비스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어린 시절부터 닥터후의 골수팬이었던 이 남자는 마니아층이 좋아할 만한 아이템-넘버 9, 타임로드 마스터, 닥터의 옛 동료 사라 제인 등-을 적재적소에 등장시켜 어른세대에는 향수를, 아이들에게는 상상력을 선물했다.
자극적이지 않은 '착한 드라마' '닥터후' 시리즈가 국민드라마의 입지를 다진 데는 데이비스의 공이 컸다. 그는 시청률이 안 나오면 자극적인 소재를 찾으려는 유혹보다는 권선징악 같은 명쾌한 교훈을 들려줘 전 연령대의 팬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데이비스를 대신해 그 자리에 들어간 스티븐 모팻은 마니아 드라마 보다는 일반인 모두에게 사랑받는 드라마를 그리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과거의 '닥터후' 시리즈를 복습해야 알 수 있는 이야기는 줄이고 처음 본 사람도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
영국에서만도 1000만 명이 시청하는 이 드라마는 지구촌 42개국에 수억 명의 시청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아마도 더 큰 틀을 생각하겠다는 계산인 듯 하다. 드라마의 골수팬들로서는 다소 김빠지는 선언일 수도 있다. 실제로 새 닥터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은 지나치게 단순한 감이 있다. 외계인 물고기가 홍수를 일으켜 베네치아를 물에 잠기게 했던 6회에서 닥터는 전처럼 알아듣기 어려운 여러 이론이나 가설을 늘어놓지도 않고 몸으로 사건을 단방에 해결한다. 마치 할리우드 서부영화에서 총잡이가 총 한 방으로 악당을 나가떨어지게 하듯.
과거 에피소드 의존성을 아예 끊은 건 아니다. 시청률을 의식했는지 3회에 이미 과거 시리즈에서 사골처럼 우려먹은 악당 캐릭터인 달렉이 또 등장했다. 4, 5회에 나온 우는 천사도 한번 써먹은 소재다. 6회에 보이는 뱀파이어를 닮은 피의 가족들은 과거 시리즈에 나온 캐리어 나이트를 연상케 한다.
물론 '닥터후'는 아직 가야할 길이 훨씬 더 많이 남았다. 몇 가지 문제점도 나아질 것으로 생각한다. '닥터후'의 선전을 기대해 본다.
최현정 기자 phoeb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