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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승냥이떼’ 헤지펀드를 이기려면…

입력 | 2010-05-17 03:00:00


최근 태국의 정국은 전시(戰時)를 방불케 한다. 총탄이 오고 가지는 않았지만 13년 전 이 나라는 또 다른 ‘경제 전쟁’을 치렀다. 1997년 중순 태국 정부와 글로벌 헤지펀드는 태국 화폐인 밧화를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자국의 허약한 경제체질을 외면한 채 당시 태국 정부는 고정환율제를 바탕으로 한 고환율 정책을 고수했다. 머지않아 통화 가치가 떨어질 것(환율 상승)을 예상한 헤지펀드는 밧화를 팔아치우며 환율이 오르는 데 베팅을 해 승리를 거뒀다. 헤지펀드들은 그해 가을 아시아에서 동진(東進)을 계속했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거쳐 한국에 상륙해 참혹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올해 들어 그리스를 시작으로 스페인 포르투갈로 번지고 있는 남유럽의 재정위기를 보고 있으니 그때의 상황이 떠오른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도 승자와 패자의 희비는 엇갈렸다. 중국 대만 홍콩은 보란 듯이 그들의 공격을 이겨냈다.

승자와 패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홍콩은 기준금리를 큰 폭으로 인상하는 초강경 조치를 취했다. 높은 금리를 노리고 해외 자금이 오히려 몰려들면서 홍콩달러의 강세는 지속되었고 헤지펀드는 결국 손을 들어야 했다. 대만도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내세워 이들에게 맞섰다. 실제 행동으로 공격을 물리친 것이다.

반면 마하티르 모하마드 전 말레이시아 총리는 “투기자금이 아시아 위기를 초래했다”며 헤지펀드의 대부 격인 조지 소로스를 ‘자본주의의 악마’라고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인도네시아도 다르지 않았다. 두 나라 모두 경제의 아킬레스건이었던 정경 유착과 취약한 경제 기반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모든 위기의 화살을 그들에게 돌렸다.

당시의 상황이 유럽에서 재연되는 것 아닌지 우려스럽다. 유럽연합(EU) 재무장관들은 13일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 극복을 위해 최대 7500억 유로의 구제금융 메커니즘에 합의하며 헤지펀드와의 일사결전을 선언했다. 안데르스 보리 스웨덴 재무장관은 이들을 ‘승냥이 떼(wolfpack)’로 지칭하며 적개심을 드러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투기에 맞서 싸워 승리할 것”이라고 전의를 다졌다.

헤지펀드들이 유로화 투매를 통해 투기에 나섰다는 흔적은 여러 곳에서 포착된다. 하지만 “우리는 괜찮은데 투기세력이 문제”라며 이들만을 희생양으로 삼는 EU 재무장관들의 발언은 본질을 비켜간 것이다. 초대형 구제금융 메커니즘 발표로 이들이 잠시 움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 냄새를 풍기는 상처(재정적자와 유로화의 구조적 한계)가 아물지 않고 구제금융 메커니즘이 실제 가동되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 공격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헤지펀드를 단순히 투기세력으로만 보는 데도 무리가 있다.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틈새를 본능적으로 찾아내는 금융자본주의의 정점에 서있는 세력이 이들이다. 시장 안정을 위해 잠시 재갈을 물릴 수는 있어도 본능마저 잠재울 수는 없다.

한국은 세계 6위의 외환보유액과 상대적으로 안정된 재정 상황으로 헤지펀드의 공격권에서 한발 떨어져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조그만 상처에도 그들은 13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입맛을 다실 게 분명하다. 우리에겐 잊혀져 가고 있는 헤지펀드의 아픈 추억을 이번 남유럽 재정위기로 되돌아봐도 괜찮을 때인 것 같다.

박현진 경제부 차장 witnes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