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민주화운동과 동아일보
4차례 특별취재반 파견
현장 참상 생생히 알려
1980년 당시 동아일보 사설은 2면에 게재됐다. 17일자(왼쪽) 신문에는 ‘중동진출의 새방향’ 이라는 사설이 정상적으로 게재됐지만 19일자(오른쪽 실선 부분)에는 신군부의 광주 무력 진압에 항거하는 뜻에서 게재됐어야 할 사설 대신 일반기사로 채워졌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당시 동아일보는 군 당국의 검열을 받아야 하는 엄혹한 비상계엄령하에서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2면 오른쪽 상단에 싣던 사설을 19일자부터 23일자까지 아예 게재하지 않는 방법으로 신군부의 광주 무력진압에 항거한 것이 대표적이다.
○ 다섯 시간 걸어 참상을 알리다
광주 현지의 기자들은 민간 통신망이 두절되자 광주지검에서 대검으로 연결되는 비상통신망을 이용해 기사를 육성으로 불러 전달했다. 이마저도 끊기자 김충식 기자는 다섯 시간을 걸어 장성우체국까지 가서 전화로 기사를 송고했다. 이런 노력 끝에 26일자 1, 7면에는 생필품이 바닥나고 은행과 통신이 마비된 현장을 생생히 묘사한 최초의 르포 기사가 실렸다. 외부와 단절된 광주의 참상을 보여준 기사였다.
세 번째 특별취재반은 22일 투입됐다. 김재곤(전 논설위원), 최맹호 기자(동아일보 대표이사 부사장)였다. 네 번째 특별취재반은 정구종(전 동아닷컴 사장·동서대 일본연구센터 소장), 배인준(동아일보 주필), 이도성 기자(전 동아일보 편집국 부국장) 등으로 꾸려졌다. 당시 호남 주재기자였던 김영택, 신광연, 홍건순 기자도 취재에 나섰다. 동아일보가 신군부에 빼앗기고 말았던 동아방송에서도 박종열, 최화경 기자(동아일보 사업국장)를 현장에 보내 국민에게 광주항쟁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 사설 게재 거부로 저항
광주항쟁의 참상이 알려지자 동아일보는 19일자부터 신문의 얼굴인 사설을 게재하지 않았다. 검열 받은 사설로는 도저히 광주항쟁의 진실을 전달할 길이 없다고 판단해 아예 사설을 싣지 않고 일반 기사로 채우는 ‘무(無)사설’로 신군부에 맞섰다. 조금이나마 광주항쟁의 기사가 실리기 시작하자 24일자부터 사설은 다시 지면에 등장했다. 다시 펜을 든 논설위원들의 첫 사설 제목은 ‘유혈의 비극은 끝나야 한다’였다. 정부를 향해 ‘사태를 직시해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하며 미봉책은 금물’이라는 경고를 보냈다.
이동영 기자 arg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