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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연극女왕]5월의 연극여왕 예수정

입력 | 2010-05-20 03:00:00

無心의 경지에서 有情을 연기하다




박영대 기자

《보통 배우들은 물 또는 불의 기운이 넘친다. 감수성이 풍부해 촉촉한 물기가 많거나, 뜨거운 열정을 지닌 이가 많다. 예수정 씨(55)는 예외적이다. 스스로 “사람이 참 건조해서”라고 말할 만큼 물기도 적지만 “사람이면 몰라도 연극이 객기 부리는 것은 싫다”고 할 만큼 자기를 꾹꾹 누르는 스타일이다.》

○ 내면연기 뛰어나 일본연극에서 빛나

그래서일까. 그는 깊은 내상을 감추고 돌처럼 무감하게 살아가는 인물의 내면연기가 뛰어나다.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일본연극에서 빛을 발할 때가 많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무심한 아내 역할로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탔던 2004년 작 ‘바다와 양산’은 일본 원작의 번안극이었다. 4월 말 무대에 올랐던 ‘기묘여행’과 현재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잠 못 드는 밤은 없다’도 일본 원작의 연극이다.

‘기묘여행’에서 어린 딸의 살해범을 면회하는 어머니 역을 맡은 그는 웅덩이처럼 고인 슬픔이 무엇인지를 보였다. 일본 사회에 대한 염증으로 ‘내적(內的) 망명’을 택하는 일본인을 그린 ‘잠 못 드는 밤은 없다’에선 모국을 그리워하면서도 그 밖에서 서성일 수밖에 없는 노년 여성의 심리를 잔잔하게 그려냈다.

“배우는 선택받아야 무대에 설 수 있는 운명이니까 자기 좋은 작품만 할 수 있는 권리는 없지만, 최소한 하기 싫은 작품을 안 할 권리는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일본(원작) 연극의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매번 그 극의 탄탄한 구조에 감탄하게 되네요.”

그는 TV드라마 ‘전원일기’의 김회장 어머니 역으로 유명했던 고 정애란 씨의 딸이고 탤런트 한진희 씨의 처제다. 배우 집안에서 자랐다는 것은 멍에인 동시에 운명이었다.

“배우 딸이란 말을 안 들으려고 어릴 적부터 해야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며 자라온 고집불통 아이가 어떻게 자유분방한 배우가 되겠어요. 대학(고려대 독문과)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은 못 해봤고 어머니도 제 성격과 안 어울린다며 반대하셨어요.”

○ “인물 분석에 놀라운 집중력 발휘”

어머니 정애란 씨는 열여섯 나이에 배우가 되겠다는 말을 꺼냈다가 “호적에서 이름을 빼라”는 아버지의 불호령을 듣고 가출한 뒤 예명으로 활동할 정도로 연극을 사랑했다. 예 씨의 성은 그 어머니의 본래 성을 물려받은 것이다. 자유당 시절 야당 활동을 하다 탄압받은 남편의 딸인 것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성을 주었다지만, 어쩌면 고집 센 딸만은 자신이 포기했던 평범한 여성의 삶을 살도록 해주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딸은 대학에서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를 접하면서 연극에 대한 경외심에 불타게 됐다. 연극반에 들어갔고 몰래 연극배우가 됐다. 1979년 ‘고독이란 이름의 여인’으로 데뷔한 그의 손목을 잡고 방송 촬영 중인 어머니를 찾아가 어렵게 허락을 받아낸 이가 유덕형 현 서울예대 학장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딸 고생하는 꼴 보기 싫다며 딸의 연극을 단 한 번도 보지 않았고 딸도 어머니를 한 번도 초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딸은 이제 최고의 내면연기를 보여주는 여배우로 어머니의 명성을 잇고 있다. “인물 분석에 있어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 준다”(김윤철 한국예술종합대 교수), “정서적 깊이가 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배우”(최치림 한국공연예술센터 이사장), “몸의 연기가 각광받는 시대 내면연기의 진수를 확인시켜 주는 소중한 배우”(김방옥 동국대 교수)라는 평이 이를 뒷받침한다.

예 씨는 “먹는 것, 입는 것에 대한 욕심만 버린다면 연극배우야말로 인생을 배울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직업”이라면서도 독일에서 교육연극을 전공 중인 딸이 배우가 되겠다고 나서면 “차라리 뮤지컬 배우를 하라”며 말리겠다고 했다. 모전여전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