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야하지 않은 ‘하녀’ 차갑지만 동시에 뜨거운 ‘시’ 배신감 느끼게 한 ‘로빈후드’ 야하고 달콤한 대사 ‘… 애인’
내 깡패 같은 애인. 사진 제공 JK필름
석가탄신일이던 21일 하루 동안 모두 네 편의 영화를 보았다. ‘하녀’(106분), ‘시’(139분), ‘로빈후드’(140분), ‘내 깡패 같은 애인’(100분)…. 아침부터 밤까지 모두 485분, 즉 8시간 5분을 관람한 것이다. 웬만한 영화광이라면 하루 대여섯 편까진 몰아서 영화를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주위로부터 내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이것이다.
“하루에 네다섯 편씩 영화를 보면 내용이 서로 헷갈리지 않나요?”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그래도 네 편의 영화를 줄이어 보려면 작은 노하우가 필요하다. 이른바 ‘야→졸→재→그’의 순서로 보는 게 효율적. ‘야한 영화→졸린 영화→재미있는 영화→그럭저럭 볼만한 영화’의 준말이다. 처음엔 야한 영화로 심신을 극도의 흥분상태로 만든 뒤(‘야’), ‘업(up)’된 상태로 졸린 영화를 극복하며(‘졸’), 피로감을 최고로 느끼는 세 번째 영화로는 가장 재미난 영화를 선택해 정면승부를 벌이고(‘재’), 다소 ‘멍’한 상태가 되는 마지막 시점에선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로맨틱 코미디로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것(‘그’)이다.
이런 이론에 따라 ‘하녀’, ‘시’, ‘로빈후드’, ‘내 깡패 같은 애인’의 순서로 관람했지만, 기대는 여지없이 배반당했다. 야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영화는 야하지 않았으며, 졸리리라 확신했던 영화는 안 졸렸고, 재밌으리라 예상했던 영화는 지루했으며, 그럭저럭 볼만하리라 생각했던 영화는 가장 재미있었으니 말이다. 지금부터 네 편의 영화를 줄이어 보면서 느낀 단상을 열거하고자 한다.
먼저 ‘하녀’. 석가모니가 탄생한 날 아침 ‘하녀’를 보긴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극장 좌석은 가득 차 있었다. 가장 큰 관심사는 ‘얼마나 야할까’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의 정사장면은 노골적이긴 했지만 야하진 않았다. 이 영화를 ‘야하다’고 평가한 일부 영화기자들과 평론가를 떠올렸다. ‘얼마나 경험의 폭이 좁고 평소 실험정신이 부족했기에 이걸 야하다고….’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내게는 부자(이정재)가 돈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하녀(전도연)를 농락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권력을 가진 하녀가 부자를 제멋대로 조종하다가 치명타를 날리는 것처럼 보였다. 성적 매력 자체가 권력이기 때문이다. 올해 내가 본 영화 중 ‘흰 속옷이 가장 야했던 영화’ 1위.
그 다음으로 본 영화 ‘시’는 놀라웠다. 일부만이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아내로, 왕년 날리던 배우였다더라’ 정도로만 아는 윤정희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포스터에다 ‘시’라고 달랑 한 글자만 쓴 포스터를 보고 ‘와! 재미있겠다’고 생각할 관객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 영화는 시처럼 감정의 여백을 남기기는커녕 치밀하게 직조된 스토리텔링을 통해 관객을 감성적·논리적으로 옥죄어 들어갔다. 화면은 조용했지만 관객이 느끼는 감성적 폭발력은 대단했다. 올해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차갑고 동시에 뜨거운 영화’ 1위.
마지막으로 심야상영을 통해 본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 예상과 180도 다른 영화였다. 유머에서도 폭력에서도, 한 치도 현실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더 웃길 수 있었지만 이 영화는 자기절제력을 잃지 않았고, 잔소리도 해대지 않았다. 정유미는 매혹적이었다. 예쁘다기보다는 ‘묘한’ 매력. 깨끗해 보이면서도 뭔가 습기가 있어 보이는 매력이 돋보였다. 특히 “안 되겠지?”(박중훈) “돼요”(정유미) 하고 주고받는 이 영화의 대사는 올해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짧고도 야하고도 달콤한 대사’ 1위.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