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백일이었던 우리딸 이제 당신도 챙겨요”
앞만 보고 달려 버틴 8년
서너시간 자며 자격증 따고
공무원 취직 뒤엔 대학 진학
여덟 살 딸의 해군 사랑
아빠 얼굴은 기억 못하지만
‘용감한 전사자’ 당당히 말해
2002년 4월 부대로 복귀하기 전 태어난 지 한 달이 갓 넘은 딸 시은이를 안고 웃고 있는 생전의 조천형 중사(왼쪽 사진). 이제 초등학교 2학년생이 된 시은이가 올해 어버이날 부모님에게 쓴 카드를 24일 어머니 강정순 씨와 함께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 제공 조상근 씨·대전=장윤정 기자
故 조천형 중사의 딸 시은이가 올해 어버이날 부모님에게 쓴 카드.
○ 백일 갓 지난 아기 남기고…
결혼 반년을 겨우 넘긴 때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울어대는 아기를 안고 정신없이 남편의 3일장을 치르고 나니 모유마저 나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분유를 먹였다. 모유에 익숙해져 자꾸 분유를 토해내다 장염에 걸린 아기를 들쳐 업고 늦은 밤 병원으로 뛰어가며 강 씨는 곁에 남편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가장을 잃은 강 씨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백방으로 일자리를 알아봤다. 첫 직장은 대전의 한 백화점. 그 전까지 살림만 하던 강 씨는 아이를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판매원으로 일했다.
직장을 얻은 뒤에도 쉬지 않았다. 2006년부터 퇴근 후 시간을 이용해 대덕대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해 2년 뒤에는 한밭대 경영학과에 편입했다. 오후 6시에 퇴근을 하면 학교에 가 수업을 듣고 집에 들어오면 10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집에서도 시은이 공부를 봐주며 과제를 위해 책을 폈다. 올해 2월 그는 경영학과 학사학위를 받았다. 대전 서구 도마동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강 씨는 조만간 또 공부를 시작할 계획이다. 사회복지학 공부를 다시 해 복지사로 어려운 이들을 돌보고 싶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정신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여 왔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이도 하늘에서 이런 저를 자랑스러워하겠죠?”
○ 아들을 앞세운 아버지는 간경화
강 씨는 이제 자신보다 시아버지인 조상근 씨(70)가 걱정이다. 강 씨는 딸 시은이를 보고 억척같이 살고 있지만 아들을 먼저 하늘로 보낸 조 씨는 몇 년간 술을 입에서 떼지 못했다.
제2연평해전으로 아들 조천형 중사를 잃은 조상근 씨가 액자 속 아들 사진을 어루만지고 있다. 대전=홍진환 기자
故 조천형 중사의 딸 시은이가 쓴 글.
강 씨가 그나마 다행스럽게 여기는 점은 조 중사가 남기고 간 딸 시은이의 가슴속에 아빠가 굳건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시은이는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우리 아빠는 왜 와서 달리기 같이 안 하느냐”며 운동회 때마다 엄마를 가슴 아프게 했다. 하지만 이제 주변에서 “아버지는 뭐 하시니”라고 물으면 “우리 아빠는 해군이셨는데 전사하셨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강 씨는 시은이가 3세 때 놀이터에서 “너희 아빠는 어디 있니”라고 묻는 동네 친구의 질문에 “우리 아빠는 죽었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조 중사의 생전 사진과 비디오 등을 틈날 때마다 시은이에게 보여줬다. 이제는 엄마보다 시은이가 해군을 더 사랑한다.
“한번은 시은이가 손을 잡고는 경비실에 가 한 경비 아저씨를 소개해주더라고요. 경비 아저씨도 해군이라고….” 시은이가 다니는 대전 서구 복수동 복수초등학교 친구들도 시은이 아빠가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해군이라는 사실을 모두 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시은이가 친구들에게 설명을 해줬기 때문이다. 얼마 전 동시대회에서도 시은이는 ‘우리와 해군’이라는 제목으로 ‘해군은 우리를 지켜주는 분들’이라고 썼다.
가족들은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빠를 가슴에 품고 사는 시은이를 위해서라도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 대한 예우가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강 씨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우리 시은이가 아빠를 외면당한 해군이 아니라 용감하게 싸우다 간 ‘전사자’로 기억할 수 있어야 해요.”
대전=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故조천형 중사는
교사 꿈꾸던 만능 스포츠맨
속 깊어 별명도 ‘애늙은이’
“사랑한다” 전화, 유언으로
1976년 대전에서 출생했다. 1남 2녀 중 둘째로 어렸을 때부터 큰 키(183cm)와 남다른 운동신경으로 대전 가양중학교 때부터 육상선수로 뛰었다. 1991년 제20회 추계전국남녀중고등학교 대회 남자중 3종경기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상도 여러 번 탔다. 힘든 훈련에도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그를 코치나 친구들은 ‘애늙은이’라고 불렀다. 조 중사의 누나 조성순 씨(36)는 “내가 막내 여동생이랑 싸우면 항상 가운데서 말리고 중재하는 사려 깊은 동생이었다”고 말했다. 대전체고를 거쳐 대전대 사회체육학과에 진학했다. 체육교사가 돼 학생들을 지도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찾아오면서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1998년 10월 해군 부사관 173기로 임관했다. 2001년 11월 7년 열애 끝에 결혼했다. 제2연평해전 발발 전날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을 정말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