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위한 희생 외면… 오죽하면 이민 갔겠어요”
2001년 어버이날을 맞아 고 한상국 중사 가족들이 경기 평택시 포승읍 해군 제2함대사령부를 찾아 한 중사가 근무하는 함정 조타실 안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른쪽부터 아버지 한진복 씨(64), 한 중사(당시 26세), 어머니 문화순 씨(63), 막내 동생 한정란 씨(29). 사진 제공 한진복 씨
결석 모르는 바닷가 소년… 솔선수범 책임있는 군인
“곧 진급” 좋아했는데…
《1975년 충남 보령시 출생. 아내와 부모, 여동생 2명이 있다. 충남 보령 무창포해수욕장에서 민박업을 하는 부모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바다와 가까웠다. 어머니 문화순 씨(63)는 “아이가 사라져 한참 찾아보면 바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영하거나 낚시를 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집에서 4km가 넘는 초등학교까지 걸어서 통학하면서 결석 한 번 안 했을 정도로 성실했다. 집안이 어려워 광천상고(광천제일고의 전신)에 진학하고 대학을 못 갔지만 군소리 없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족의 생계에 도움을 준 효자였다. 집에서 장손인 때문인지 모든 일에 솔선수범했다. 부사관 155기 동기 최훈호 상사(35)는 “늘 앞장서서 동기들을 챙기는 책임감 있는 친구였다”고 말했다. 해군에 자원해 2001년 8월 참수리 고속정 357호의 조타장이 됐다. 사고 닷새 전인 2002년 6월 24일 어머니에게 전화해 “일주일만 있으면 중사 계급을 단다”며 좋아했지만 새 계급장을 달지 못했다.》
피말린 41일간의 ‘실종’
軍 -청와대에 전화… 편지… “심한 수색 北자극” 답변
“교전이 나던 그날 남편은 이미 죽었던 거예요. 그걸 모르고 41일간 피를 말리며 기다렸죠. 천안함 46용사 가족들의 아픔은 누구보다 우리가 잘 이해합니다.”
북한군의 공격이 있던 날 참수리 357호정에 타고 있다가 전사한 4명은 곧바로 장례를 치렀지만 김 씨는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해 한동안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천안함 사건 때 46인의 영정이 함께한 분향소가 솔직히 부럽더라고요. 저는 40여 일 뒤 혼자 장례를 치렀잖아요….”
○ 유일한 실종자, 41일간의 고독한 싸움
2010년 3월 26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학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피곤한 몸을 뉘었다. 전화가 울렸다. 지인이었다. “그 소식 들으셨어요? 해군 초계함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에서 침몰했대요.” 가슴이 쿵쾅댔다. 8년 전 같았다.
2002년 6월 29일 아침. 시아버지 한진복 씨(64)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해 북방에서 사고가 터졌다는데 얘(한상국 중사)가 탄 배인지 한 번 봐라.” 급히 TV를 켰다. 참수리 357호정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편이 탄 배였다. 미친 듯이 전화를 돌렸지만 아는 해군 관계자들의 전화는 모두 불통이었다. 두세 시간이 흐르고 TV 화면에 남편 이름이 떴다. 사망자, 생존자도 아닌 ‘실종자’였다.
남편을 하루라도 빨리 찾기 위해 해군 관계자와 청와대 민원실에 전화하고 편지 쓰는 것이 김 씨의 일과가 됐다. 분명 가라앉는 배와 끝까지 함께했을 텐데 군과 정부는 수색인력을 보강할 기색이 없었다. 한 군 관계자는 “함정을 대거 투입했다가 북한을 자극하기라도 하면 당신이 책임질 것이냐”며 오히려 벌컥 화를 냈다. 김 씨는 맥이 탁 풀렸다.
美서 느낀 전사자 예우
군인유족이면 이방인도 배려… 6·25행사장 가장 상석 배정
○ 미국에서 본 전사자 예우
김 씨는 2005년 훌쩍 미국으로 떠났다. 김 씨가 미국으로 간 것은 제2연평해전 직후 ‘미국 매사추세츠 주 한국전쟁 기념물 건립위원회’와 맺은 인연 때문이었다. 2003년 김 씨는 매사추세츠 주 우스터라는 도시에서 한국전쟁 기념물 건립위원회 창립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해 보고 싶어 무작정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본 군인에 대한 국가사회적 예우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일개 외국인일 뿐인 내가 한국에서 온 전쟁 유가족이라는 것을 알고 행사에서 가장 상석인 존 케리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 옆자리를 내줬다”며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우리의 형제애(our brothership)’라는 배지 1000개를 만들어 위원회에 선물했더니 기부금 기탁자들을 새기는 벽돌에 6명의 전사자 이름을 새겨주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당시 김 씨는 우리 정부의 전사자에 대한 무관심에 크게 실망한 터였다. “내 남편이 죽음으로써 지키고자 한 국민, 정부가 남편 죽음의 가치를 몰라주는 데 큰 배신감을 느꼈어요. 이런 나라에 살아서 뭐하나 싶었죠.”
불법체류자 신세로 홀로 뉴욕 주 퀸스에 정착한 김 씨는 3년간 청소, 식당일 등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하며 악착같이 살았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면서 2008년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되찾고 싶은 명예
사고 이틀뒤가 진급일인데 추서 계급 ‘상사’ 됐어야…
김 씨는 국가보훈처 서울지방보훈청의 소개로 지난해 7월부터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기 시작했지만 몸이 좋지 않아 올해 2월 그만뒀다. 요즘은 야간대로 문헌정보학을 배우러 다닌다. 남편의 사건 이후 각종 언론과 상대하면서 느꼈던 답답함을 떨치기 위해 사이버대에서 언론정보학을 공부하기도 했던 김 씨는 귀국 후 관심의 폭을 넓혔다.
김 씨는 천안함 침몰사건을 계기로 오랫동안 접었던 싸움을 재개하려 한다. 사고로부터 불과 이틀 뒤인 7월 1일이 진급 예정일이었던 남편은 8월 9일 시신으로 발견됐다. “천안함 침몰사건 때처럼 실종 상태로 진급예정일을 맞았으니 사망 시점을 7월 1일 뒤로 해줬으면 남편도 중사로 진급했을 것”이라는 게 김 씨의 주장이다. 그러면 추서계급까지 합쳐 최종적으로 남편은 상사를 달게 된다.
김 씨는 “보상금을 더 원하거나 대단한 명예를 원하는 게 아니다”라며 “그저 우리 남편이 당연히 받아야 했을 공로의 인정과 예우, 그거면 족하다”고 말했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