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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이 존경받는 사회]윤영하 소령 아버지의 소원

입력 | 2010-05-29 03:00:00

“소외된 장례식… 분하고 억울해 눈물도 안나와”




배신당한 전사자의 혼
장례식 축소 훈장 등급 깎여
김前대통령 ‘월드컵 외유’ 서운

아들이 준 하얀봉투
6월 8일 출동직전 함께 식사
처음이자 마지막 용돈 건네


해군 대위 출신인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벼락같은’ 소식을 들었던 2002년 6월 29일에도, 이틀 뒤 치러진 영결식에서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들의 전우 한상국 중사의 시신은 41일 만에 배와 함께 찾았다. 박동혁 병장은 84일 동안 부상으로 신음하다 숨을 거뒀다. 영결식과 한 중사, 박 병장의 장례식을 포함해 세 번의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아버지는 “분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서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8년이 지나고 아버지는 달라졌다. “사고 처리가 끝난 다음부터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왔다”고 말했다. 절에서 아들을 추모하다가, 집에서 아들의 기사를 읽다가 갑자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14일 경기 시흥시 자택에서 만난 그는 꼿꼿한 자세로 인터뷰를 하다가 갑자기 “미안하다”며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흘렸다. 2002년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 씨(68)다.

고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 씨(왼쪽)와 어머니 황덕희 씨가 14일 경기 시흥시 자택에서 아들의 유품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앞의 훈장이 윤 소령이 사후 받았던 충무무공훈장이다. 사진첩에 해군 복무 시절 윤 소령의 모습이 보인다. 시흥=전영한 기자

○ 날벼락 같은 죽음, 그리고 명예

“서해에서 북한 배하고 교전이 일어났다는데 영하는 괜찮을까요?”

윤 씨는 2002년 6월 29일 오전 외출했다가 집에 있던 부인 황덕희 씨(64)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해군사관학교 18기 출신인 윤 씨는 바로 평소에 연락하던 해군 후배에게 전화했다. “사망자 중 장교는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안심했지만 곧 TV에 보도된 사망자 명단에 ‘윤영하’라는 이름이 나왔다.

“1999년 제1연평해전에서 우리 군이 대승을 했으니 분명 북한군의 보복이 있을 것이라 봤어요. 그렇게 되면 북한군이 기습할 테니 우리 피해가 클 것이라고도 생각했죠.”

그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아들의 죽음이 “명예로웠다”고 했다. 윤 씨는 “군인은 언제든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라며 “국가를 위해 전사했다는 것보다 군인에게 더 명예로운 일은 없다”고 말했다.

다만 제2연평해전 당일부터 오락가락한 군과 정부의 태도는 두고두고 아쉬웠다. 윤 씨가 사고 당일 아들의 시신이 안치된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현장 해군 관계자는 윤 씨에게 “5일장에 을지무공훈장 수여로 예우가 결정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해군은 유가족들에게 “3일장은 어떠냐”고 의견을 냈고 이는 그대로 반영됐다. 훈장도 을지무공훈장에서 한 단계 깎인 충무무공훈장이 수여됐다. 윤 씨는 “해군에 있는 후배에게 왜 훈장 등급이 깎였느냐고 물어보니 ‘미안하다’고만 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대통령과 정부의 태도는 더욱 안타까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제2연평해전이 벌어진 다음 날 일본으로 출국했다. 월드컵 공동 개최국 정상으로 결승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지만 윤 씨는 대통령의 출국에 문제가 있다고 봤다. “전쟁이 나면 대통령은 밖에 있다가도 들어와야 합니다. 그게 정상적인 국가예요.”

영국 런던 체류 시절 초등학생이던 고 윤영하 소령의 모습. 해운회사에 다닌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시절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3년 동안 살았던 윤 소령은 영어와 수영, 테니스 등을 아주 잘했다. 사진 제공 윤두호 씨

○ 마지막 소원

윤 씨가 아들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02년 6월 8일 출동 직전이었다.

“출동을 나가면 거의 한 달씩 차를 햇빛 아래 세워둬요. 그래서 종종 평택 해군 2함대에 있는 영하 차를 내가 집으로 가져오곤 했어요. 차 가지러 갔다가 부대 앞에서 만났습니다.”

그날은 아버지의 생일이었다. 점심으로 두부전골을 먹은 부자(父子)는 자동차 열쇠를 주고받은 다음 헤어졌다. 떠나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흰 봉투를 내밀었다. 아들은 “아버지 생신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했다. 50만 원이 든 하얀 봉투는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용돈이었다. “박봉에 아버지 생일이라고 월급을 조금씩 모았을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나네요.”

윤 씨는 기자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고 말했다. “염치없지만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의 공식 추모식에 대통령이 한 번이라도 참석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든 내년이든 상관없어요. 2002년 영결식 당시에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모두 오지 않았죠.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마지막까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책임지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시흥=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 故 윤영하 소령은…
영어 능통 만능 스포츠맨
교관 마다하고 함상근무 자원
진중한 성격 ‘고민 상담사’


1973년 11월 24일 인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3년 동안 가족이 해운회사를 다닌 아버지를 따라 영국 런던과 네덜란드 로테르담 등에 체류해 영어에 능통했다. 수영과 테니스도 수준급인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군인 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1992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96년 해사 50기로 임관했다. 가족들은 “영어를 잘하니 해사 교관으로 남으라”고 권유했지만 본인이 해군의 ‘최전방’인 함상 근무를 자원했다.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항상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해 주위의 신임이 높았다. 동생 영민 씨(33)는 “항상 차분했으며 옳은 길을 선택해 가려는 믿음직한 형이었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해사 동기인 최민석 예비역 소령(37)은 “재학 당시 진중한 성격 때문에 (윤 소령에게) 고민 상담을 하는 동기들도 많았다”고 전했다.

▼ “월드컵 응원했던 아들 월드컵에 묻힐 줄이야” ▼

2002년 6월 14일 MBC 뉴스데스크에 출연해 “(월드컵을) 마음으로 응원하겠다”고 말하던 고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의 모습. MBC TV 화면 캡처

“경기장에 갈 수는 없지만 온 국민과 함께 우리 대표팀의 16강 진출을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전국이 2002 한일 월드컵 열기에 휩싸인 2002년 6월 14일. 당시 29세의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이 TV에 나와 씩씩하게 말했다. 이날 한국은 포르투갈을 1-0으로 꺾고 축구 월드컵 출전 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진출했다. 전국적인 월드컵 응원 열기를 전한 MBC ‘뉴스데스크’ 프로그램에서 윤 소령은 경기 평택시 해군 2함대 동료들과 함께 출연했다. 해군사관학교 동기인 최민석 예비역 소령은 “해군 2함대에서 출동했다 들어오며 찍은 영상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방송된 화면이 부모에게는 윤 소령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다. 어머니 황덕희 씨는 “그때는 별생각 없이 봤지 그게 마지막일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윤 소령은 TV에 나오고 보름 뒤인 6월 29일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했다. 윤 소령은 “대표팀을 응원하겠다”고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포함한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은 월드컵의 열기에 묻혀 국민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시흥=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 청와대 찾은 제2연평해전 유족들
묘비문 교체-전사자 예우 개선 등 건의


제2연평해전 전사자 유가족들이 28일 청와대를 방문해 전사자 대우와 관련된 가족들의 요청사항을 전달했다. 청와대 측은 이날 접수한 가족들의 요청을 관계기관과 충분히 협의하기로 했다.

제2연평해전 전사자인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 씨(68)는 이날 “1시간 동안 청와대를 방문해 그동안 가족들이 생각하고 있던 문제점들을 이야기했다”며 “청와대 측도 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도와주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전사자 6명의 가족 중 윤 씨 등 3명의 유가족이 이날 면담에 참석했다. 이들은 전사자 묘비문의 표기를 바꾸는 문제와 한상국 중사의 사후 진급 문제, 전사자 예우 향상 등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다. 가족들은 그동안 ‘연평도 근해에서 전사’로 표시된 전사자 묘비를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로 바꿔줄 것을 국가보훈처 등에 요청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또 교전 당시 41일 동안 실종된 채 진급일이 지났지만 결국 진급하지 못했던 한 중사의 진급 문제도 제기했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 ‘6용사 사연’ 독자 큰 반향
“너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것 같아 미안”
“전사자에 예우 다하는게 국격 높이는 일”


“당신을 너무 오랫동안 잊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2002년 월드컵의 함성에 가려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제2연평해전의 희생 장병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24일부터 6회에 걸쳐 소개한 동아일보 ‘제복(MIU)이 존경받는 사회-제2연평해전 6인의 용사도 잊지 않겠습니다’ 시리즈가 나간 후 가족들을 돕고 싶다는 독자들의 연락이 이어지는 등 반향이 일고 있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했음에도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아들들 때문에 한이 맺혔던 유가족들은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고 조천형 중사의 아버지 조상근 씨(70)는 “이제 많이 덤덤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면에 등장한 아들의 얼굴을 보고 다시 눈물이 났다”며 “늦게라도 아들의 목소리를 담아줘 고맙다”고 거듭 전했다. 고 서후원 중사의 아버지 서영석 씨(57)는 “8년간의 기다림이 그래도 보람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제라도 정부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제대로 예우하기 위한 법과 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찰소방공상자후원연합회 봉사회장인 이학영 씨(53)는 “천안함 사건이 터진 지금 제2연평해전 6용사를 재조명한 것은 시기적절한 일”이라고 말했다. 한 군 관계자는 “당시에 스러져간 분들의 명예를 드높인 의미 있는 기획이었다”며 “앞으로 군에서 전사자에게 예우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곧 국격(國格)을 높이는 일”이라고 말했다. 서울 도봉구 광염교회는 유가족들을 위해 써 달라며 600만 원의 성금을 전해왔다. 이석진 부목사는 “전사자 가족들의 사연을 읽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아 조금이라도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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