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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언어로 꿈꾸는 ‘소통’

입력 | 2010-05-31 03:00:00

이신조 신작 소설집 ‘감각의 시절’
이야기보다 감성적 분위기 살려




 사진 제공 문학과지성사

“모든 것을 낱낱이, 생생히, 온전히 기억한다는 거짓말. 기억은 알을 품고, 잎을 틔우고, 바람에 펄럭이고, 안개에 휩싸이고… 주름이 잡히고, 살얼음이 끼고, 머리털이 서고, 시큼하게 발효한다, 기억은.”(‘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너를 기억하기 위해 필요한 고독’)

소설가 이신조 씨(36·사진)가 신작 소설집 ‘감각의 시절’(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 숨 가쁘게 이어지는 그의 문장들은 시적이다. 서사의 디테일은 섬세한 언어를 통해 환기되는 감각, 분위기 등으로 대체된다. 이 씨는 “작가로서의 내 감수성은 이야기꾼과는 거리가 멀다. 등단할 때부터 감성적이고 예민한 부분에 의존해왔고 지금까지 그렇다”며 그런 의미에서 ‘감각의 시절’이란 제목을 붙였다고 말했다. 제목대로 책에는 청춘을 관통하는 감수성이 가득하다. 날카롭고 세련된 언어의 운용을 바탕으로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품들을 주로 수록했다.

작가는 관계와 소통에 대한 문제의식을 언어를 매개로 파고든다. 첫 번째 수록작인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는 이 같은 특색을 뚜렷이 보인다. 실패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사랑, 기억이라는 두 가지 층위로 서술하면서 언어의 다름이 타자를 만들고 기억으로 인해 왜곡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그려낸다.

‘베로니크의 이중생활’은 한국에서 태어나 벨기에로 입양된 베로니크가 자신의 한국 이름을 접하면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을 다뤘다. 언어적 명명에 의해 형성되기 이전의 존재에 대한 탐색이 주를 이루면서 언어에 대한 작가의 일관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어린 나이에 죽은 혼령이 서울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동생을 찾아다니는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 여행을 떠난 소설가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낸 ‘앨리스, 이상한 섬에 가다’ 등도 수록했다.

1998년 등단한 이후 소설집 ‘나의 검정 그물 스타킹’ ‘새로운 천사’, 장편소설 ‘기대어 앉은 오후’ 등을 활발히 펴냈던 것을 감안하면 오랜만의 신작이다. 작가는 “그동안 운 좋게 책을 자주 낸 편이었는데 5년 정도 슬럼프가 길게 왔던 것 같다. 그 시절을 일단락하는 책인 것 같아 더 뜻 깊게 느낀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