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앵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5월 31일 동아 뉴스 스테이션입니다.
어느 덧 가정의 달 5월도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요. 피부색은 다르지만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생각케 하는 다문화가정이 있습니다.
(구가 인 앵커) 남편이 세상을 뜬 이후에도 한국에 남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세 자녀와 병든 시부모를 돌보는 베트남 새엄마 이야긴데요. 영상뉴스팀 신광영 기자가 보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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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한국 생활 6년째인 스물 네 살의 베트남 주부 쿠엔킴풍 씨.
(현장음) "엄마 다녀오셨어요"
집에 오자 반신마비로 누워 지내는 시아버지의 안부 먼저 살핍니다.
(현장음) "아버지 오늘 어디가 불편하셨어요."
몸은 녹초가 됐지만 아이들이 많다보니 집안일도 만만치 않습니다.
(현장음) "저녁 먹었나? (아니요. 아직 안 먹었어요.) 왜? (살 빼려고.)"
다음날 아침, 킴풍 씨가 아침 준비로 분주합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큰 딸부터 다섯 살배기 막내딸까지 3시간에 걸쳐 밥을 챙겨 먹이는 동안 킴풍 씨의 남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남편은 2년 전 고깃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 조난사고로 숨졌습니다.
이 중 막내를 뺀 세 남매는 남편이 이혼한 전 부인과 낳은 아이들. 큰 딸과는 9살 차입니다.
(인터뷰) 쿠엔킴풍
"저는 (애들이) 안쓰럽고 불쌍해 죽겠어요. 아빠, 엄마 있으면 이렇게 안 살 텐데. 나가면 다른 친구들보다 옷 같은 것도 없고, 시내도 못 나가고, 밤에는 혼자 우는 데 혼자. 딸내미."
남편이 떠나고 혼자 남게 됐을 때 주변에선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권유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킴풍 씨는 아빠마저 잃게 된 세 남매가 눈에 밟혔습니다.
(인터뷰) 쿠엔킴풍
"처음에는 (아이들과) 마음이 잘 안 맞아서 싸울 때도 있고 혼낼 때도 있고 그랬는데 애들은 아빠가 없어서 그런지 보기에도 안 됐고, 사는 게 힘들어도 열심히 살아야지 어쩌겠노."
어렵게 결심은 했지만 홀로 짊어진 생계의 짐은 가볍지 않았습니다.
모텔 청소를 하고 있지만 일감이 규칙적이지 않아 한 달 벌이는 30만원 안팎.
여기에 정부 보조금 80여만 원을 보태 110만원으로 일곱 식구가 삽니다.
이 중 30만원은 당뇨와 심장병을 앓고 있는 시아버지 병원비로 들어갑니다.
(인터뷰) 최영옥 / 시어머니
"몸 아픈 아버지도 잘 거두고 애들한테도 잘하고 나한테도 솔직히 딸보다 나아요. 내가 낳은 자식보다 이 사람이 나아요."
며느리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엄격하기만 했던 시어머니도 이젠 든든한 후원자가 됐습니다.
고향에 다녀오라며 없는 형편에 돈까지 빌려 비행기 표를 구해주고, 친정에 자주 연락하라고 전화카드로 매달 사줍니다.
(인터뷰) 쿠엔킴풍
"이렇게 살기 힘든데 엄마는 너 안 붙잡는다. 비행기 값 내줄테니까 너 가고 싶으면 가고 정희도 데려가고 애들은 내가 잘 키울 테니까. (어머니가) 그런 말 했거든요. 근데 저는 아직 그런 마음 없으니까 생각을 안 해봤어요."
남편이 살아있을 땐 대화가 거의 없었던 세 남매도 지금은 엄마의 전담 한국어 선생이 됐습니다.
평소 킴풍 씨와 눈도 잘 맞추지 않던 초등학생 아들은 배다른 여동생이 투정을 부리면 업어서 달랠 정도로 자상해졌습니다.
킴풍 씨는 지난 어버이날 한국 생활 처음으로 아이들에게 카네이션과 편지를 받았습니다.
(인터뷰) 쿠엔킴풍
"애들 편지 보면 애들도 이제 컸구나. 아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그날 제가 좀 슬펐어요. 애들이 꽃 달아 주고 편지 줘서 보는 데 울었고."
(편지 낭독) 쿠엔킴풍
"엄마가 저희 가족한테 잘해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하고 사랑해요. 엄마 앞으로 잘 살아봐요."
동아일보 신광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