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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史·哲의 향기]감정의 지정학

입력 | 2010-06-05 03:00:00

◇감정의 지정학/도미니크 모이시 지음·유경희 옮김/256쪽·1만3000원·랜덤하우스코리아
‘굴욕 - 두려움 - 희망’으로 다시 그린 세계지도




감정으로 국제관계를 설명한 정치학자 도미니크 모이시 씨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두려움’과 ‘굴욕’의 대립으로 해석했다. 2008년 8월 이스라엘군이 쏜 고무탄에 맞아 숨진 소년의 장례식 날, 요르단 강 서안의 니린 마을에서 깃발을 흔들며 항의 시위를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주민들. 동아일보 자료

탈냉전 시대 국제관계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많았다. 학자들의 관심사는 ‘이데올로기’가 빠진 자리를 대신하는 ‘그 무엇’을 찾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은 이는 새뮤얼 헌팅턴이다. 1993년 발표한 논문 ‘문명의 충돌’과 1996년 같은 제목으로 출간한 책에서 그는 냉전 이후의 세계를 7, 8개의 문명으로 구분 짓고 분쟁의 이유를 문명들 사이의 대립으로 해석했다.

이 책은 헌팅턴이 주장한 바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은 다르다. 저자가 제시하는 화두는 문화나 종교가 아닌 ‘감정’이다. 감정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국제관계를 바라보면 지정학적, 문화적 결정주의가 갖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프랑스 소르본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프랑스국제문제연구소(IFRI) 고문으로 활동 중인 정치학자다.

그는 감정 가운데 굴욕, 두려움, 희망 세 가지를 꼽으며 이를 기준으로 세계지도를 다시 그릴 수 있다고 말한다. ‘굴욕’으로 구분되는 지역은 이슬람권이다. 굴욕이 이슬람 세계의 지배적 감정이 된 것은 몰락한 현실 때문이자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이다.

특히 세계화 절차에 대한 좌절감이 굴욕을 심화시켰다. 이슬람 세계는 서구와 아시아가 세계화 파도를 타는 데 성공한 반면 자신들은 실패해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고통스럽게 인식하고 있다. 굴욕은 절망에 이르며 쉽사리 파괴로 향하고 테러의 한 원인이 된다.

서구 세계가 직면한 정체성의 위기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으로 요약한다. 경제적으로 추격해 오는 아시아, 테러에 대한 우려, 경제적 불확실성 등이 두려움의 원천이다. 서구인의 정말 큰 두려움은 예전만 못한 영향력과, 그에 따라 미래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데서 비롯됐다.

오늘날 희망은 경제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저자가 꼽은 희망의 거점은 아시아, 그 가운데서 중국과 인도다. 특히 인도는 미래에 대한 비전 덕에 매우 희망적인 것으로 내다봤다. 11억 명의 인구 가운데 7억 명이 25세 이하일 정도로 ‘젊은 국가’라는 점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에 대해선 “북한 정권이 재래식 위협을 가하거나 중국이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을 잃지 않고 성공적인 국가로 향해 가고 있다”고 말한다.

‘감정’이라는 주관적 개념으로 세계를 재단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그야말로 주관에 흐를 소지가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예로 들며 “세계를 분석하는 데 감정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정치 세계의 근본적인 면을 무시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 두 나라 분쟁의 원인은 이스라엘의 ‘두려움’과 팔레스타인의 ‘굴욕’의 충돌이라는 것이다.

감정은 여러 방향으로 열린 가능성을 내포한다. 특정 감정의 권역에 있더라도 얼마든 다른 감정으로의 전환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굴욕, 두려움, 희망의 세 감정을 엮어주고 변주를 주는 것은 ‘자신감’이다. 희망은 자신감의 표현이며 두려움은 자신감의 결여다. 굴욕은 희망의 상실로 자신감에 상처를 입을 때 비롯된다.

저자는 “21세기는 ‘아시아의 세기’이자 ‘정체성의 세기’가 될 것이며 이데올로기에서 정체성으로, 서에서 동으로의 평행이동은 그 어느 때보다 감정이 중요해졌음을 뜻한다”고 강조한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