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는 미군정 하에서 경성대학과 9개 전문학교를 합쳐 종합대학으로 출범한 1946년을 개교 원년(元年)으로 잡는 바람에 이런 디스카운트를 자초했다. 경성제국대학(광복 후 경성대학)은 일본인 교수와 일본인 학생이 주류를 이루던 식민지 대학이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국사학)는 “경성제대에 대한 거부감으로 광복 이전에 세워진 9개 전문학교도 서울대 교사(校史)에서 추방됐다”고 설명한다.
서울대가 통합한 9개 전문학교 중 원년이 가장 이른 법관양성소는 1895년 설립 첫해에 50명이 입학해 47명이 졸업했다. 법관양성소의 커리큘럼은 오늘날 법과대학의 필수과목이 다 들어 있어 한국 최초의 근대적 법과대학으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법관양성소는 법학교→경성전수학교→경성법학전문학교로 개편되다가 법통(法統)이 서울대 법대로 그대로 전수됐다. 서울사대도 같은 해 세워진 한성사범학교의 법통을 물려받았다. 1904년 설립된 농상소학교는 서울대 농대로 이어졌다.
조선총독부가 한국인의 고등교육을 억압하는 바람에 대한제국이 세운 교육기관들은 대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전문학교 수준에 머물러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좌절시키기 위해 1924년 경성제대를 세웠다. 서울대는 경성제대의 후신이 아니다. 경성제대는 서울대로 통합한 10개 교육기관의 하나였을 뿐이다. 서울대로 통합된 전문학교들은 법관양성소를 필두로 대한제국이 교육을 통해 근대화를 달성하려던 개혁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울대는 1946년 대통합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근대적 교육을 통해 국권을 바로 세워보려던 비원(悲願)의 역사를 지워버린 것은 잘한 일이 아니다. 서울대 법대는 법관양성소 졸업생인 이준 열사와 함태영 전 부통령을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으로 현창한 바 있다. 단과대학의 역사는 한 세기를 넘겼는데, 종합대학교가 된 날로부터 개교 원년을 따지는 것은 기형적인 역사인식이다. 이 열사나 함 부통령 같은 애국지사들을 폐교(廢校)의 미아로 만들어버린 결례다.
여러 교육기관이 합쳐져 종합대학이 된 경우 가장 오래된 기관의 설립일자를 원년으로 삼은 대학도 있고, 통합 시점을 원년으로 삼는 대학도 있다. 대학의 원년을 정함에 있어 세계적으로 공통된 기준은 없다. 어디까지나 대학 구성원의 합의와 선택의 문제이다. 연세대는 1957년 연희대와 세브란스의대가 통합해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연세대는 1884년 고종황제의 명으로 세워진 제중원(濟衆院)을 효시로 삼는다.
세계 유수의 명문대학들도 그 시작은 미약했다. 거대한 종합대학이 된 후부터 원년을 따진다면 하버드대도 개교 원년을 한참 디스카운트해야 한다. 하버드대는 미국 플리머스에 최초로 유럽인들이 이주한 지 16년 만인 1636년에 설립됐다. 처음에는 교사 1명에 학생 9명으로 시작한 목사 양성소였다. 1886년 5월 31일 미국 북감리교 여선교부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 여사가 서울 정동의 자택에서 여학생 한 명을 데리고 수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124주년을 자랑하는 이화여대의 최초 모습이다. 서울 공릉에 있는 국립 서울산업대는 올해 개교 100년을 알리는 대형 아치를 세워놓고 1910년 설립된 어의동실업보습학교로부터 한 세기 내려온 학풍을 자축하고 있다.
서울대의 국제적 위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과도 연관된 문제다. 서울대가 한국의 경제규모에 걸맞게 세계 10위권 대학으로 도약하려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의 명문대학들과 경쟁해야 한다. 해외에서 심사하는 대학평가에서 학문의 전통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내외 대학의 사례를 살펴보더라도 서울대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51년의 역사를 별 이유 없이 내팽개친 경우에 해당한다.
대한제국이 제국주의 열강의 발톱 아래서 신학문을 가르쳐 나라를 구해보려던 구국(救國)교육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서울대의 잃어버린 뿌리 찾기이자 격랑의 시대를 살다간 선배들에 대한 예의다. 서울대가 법인화를 계기로 한 세기가 훌쩍 넘는 개교 원년을 회복해 세계 속으로 도약할 기회를 잡기 바란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